혁명이 무르익었다: 제3세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혁명이 무르익었다: 제3세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Jeremy Friedman의 Ripe for Revolution: Building Socialism in the Third World 서평.

임명묵

발전된 산업 자본주의 국가가 자체적인 계급 모순으로 붕괴하여, 무산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가 탄생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핵심 교리였다. 하지만 실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곳은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 수준이 상대적으로 미비했던 러시아였다. 이후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진로 또한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정반대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발전된 산업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이익을 공유하는 복지국가가 자리 잡았고, 혁명의 전망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대신 소련이 스탈린 시기에 거둔 눈부신 성취는 역설적으로 선발 국가들이 아니라 후발 국가들의 혁명가들을 사로잡았다. 후진적이었던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통해 현대성을 성취하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해냈다면, 러시아보다 낙후한 국가에서라도 얼마든지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고,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선발 국가들을 추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소련 또한 일찌감치 마르크스주의의 교리가 실제 현실에서 적용되는 양상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러시아 혁명기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문제 의식을 가졌던 소련 공산당은 산업 자본주의가 전혀 발전하지 못한 비서구 세계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시작된 탈식민화의 물결과 ‘제3세계’의 등장은 비서구의 저개발 지역을 통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음을 뜻했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현대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제3세계에서 경쟁을 시작했고, 소련은 탈식민 지역이 제국주의 세력과 봉건적 지배 계급을 무찌르고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올바른 지도와 적절한 지원을 제공해야만 했다.

제3세계에서 중소 경쟁을 다룬 저자의 전작, "그림자 냉전: 제3세계에서의 중소 경쟁"

하지만 실제 소련이 탈식민 국가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제3세계의 사회주의 건설이란 상상 이상의 난관을 돌파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제레미 프리드만의 Ripe for Revolution: Building Socialism in the Third World (2022)는 바로 이런 난관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향한 탈식민 국가들과 소련의 열망은 수많은 지역적 맥락이 개입되면서 굴절되었고, 현지의 혁명가들과 모스크바의 당국자들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와 특정 국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오해를 빚고, 또 충돌하기도 했다. 소련은 냉전의 적대적 경쟁자인 미국의 개입, 사회주의 종주국을 둘러싼 중국과의 경쟁을 항상 의식하며 행동해야 했고, 이는 소련의 행동반경과 선택지를 크게 제약하는 요소가 되었다. 또한 공산당의 정치적 장악력이 떨어지고, 자본과 기술의 발전 수준이 크게 낮은 지역에서 어떻게 하면 발전된 경제를 건설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공고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해진 정답은 없었다. 따라서 소련이 선택해야만 했던 유일한 길은 실제 제3세계의 사회주의 건설을 지원하고 감독하며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이 수많은 시행착오는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소련의 지식인과 정책 결정자들에게 교훈을 안겨주었고,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와 역사적 경험, 현지의 맥락 사이에서 끝없는 조정을 거치며 계속해서 진화해 나갈 수 있었다. 저자는 냉전 시대를 단순한 ‘미국 패권의 절정’, 혹은 ‘미소 양대 초강대국의 시대’로 규정하기보다는, 현대 세계의 형성에 참여한 수많은 제2세계와 제3세계의 행위자들의 영향과 유산까지 종합하여 더욱 온전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위해서 다시 조명되어야 할 역사적 경험이 바로 제2세계와 제3세계의 상호작용을 통한 사회주의의 진화라는 것이다.

저자가 사회주의의 진화를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한 사례는 다섯 개로, 각각 인도네시아, 칠레, 탄자니아, 앙골라, 이란이다. 수많은 사례 중에서 이 다섯 개 국가가 선택된 이유는 소련 당국자들이 제3세계 정책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 사례들임과 동시에, 공산당의 확고한 영향력이 작동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공간이었기에,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과 시행착오가 극명하게 발생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책은 이 다섯 국가의 사회주의 경험을 순차적으로 제시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제3세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 진화하는 역사적 개념이었기 때문인데, 저자는 소련과 사회주의 세계가 앞선 실험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을 항상 다음 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에 참조할 주요한 근거로 삼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개별 장은 현지의 역사적 맥락과 그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형성을 넓게 개괄한 뒤에, 각 국가에서 전개되는 사회주의 건설의 결정적 순간들을 세부적으로 보여주고, 해당 국가의 경험을 통해 소련과 사회주의 세계가 어떤 교훈과 학습 효과를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저자가 소련 지식 생산자들의 담론을 분석하기 위해 주로 사용한 저널. "세계 경제와 국제 관계". 여전히 출간되고 있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역사적으로 직접적 상호작용도 크지 않았을 5개 국가의 역사를 폭넓게 개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5개 국가의 현대사를 다룬 2차 연구를 인용하며 지역적, 역사적 맥락을 깊이 있게 제시해주며, 이를 통해서 해당 국가의 역사와 지역적 맥락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그 뒤에 저자는 주로 소련, 중국, 동독, 그리고 5개 국가 현지의 1차 자료들을 통해서 제2세계와 제3세계가 어떻게 소통했는지, 실제 사회주의 건설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많이 등장하는 것은 소련과 동독의 관찰 및 평가 기록이다. 외교 문서, 대사관 직원들의 보고서, 소련 공산당 국제부 관료들의 기록과 현지 공산당에 내리는 지침이 등장하고, 종종 외교관들의 회고록도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 개념의 진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소련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 연구자들의 연구와 논쟁들이 실리는 학술지들과 학자들의 저서가 제시된다. 소련의 지식 생산 기구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침으로 삼아 세계 각 지역의 현실을 분석하며 공산당의 정책 결정자들이 참조할 수 있는 지적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했기 때문이다. 이 학술적 작업들은 단순한 지역 지식을 확보하는 차원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는 가능성부터 예상되는 난관, 그리고 현지 및 소련 공산당의 대응 방침까지 제시하는 나침반이었고, 역시나 앞선 경험들을 반영하며 계속해서 진화해 나가는 구성물이었다.

1장의 인도네시아는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를 지원하고자 했던 소련의 가장 초기 시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네덜란드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탄생한 인도네시아에서 소련이 지원한 세력은 당연하게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었다. 독립 투쟁의 과정에서 전위대를 중심으로 무장봉기를 전술로 채택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1920년대에는 네덜란드 식민 당국, 1940년대에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지도자인 수카르노의 탄압을 받으며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대중정당으로의 노선 전환을 권유한 스탈린의 조언을 따르며 무서운 기세로 확장했고, 흐루쇼프 시대에 소련은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자원과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를 사회주의 세계로 끌어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동시에 제3세계 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던 수카르노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카르노는 충분히 사회주의적이지 않았으나, 네덜란드와의 독립 투쟁을 이끌고 미국의 조건부 원조에 항의했다. 결정적으로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열리면서 수카르노는 세계 각지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수카르노가 각종 ‘진보적’ 의제에 관심을 보였기에 소련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수카르노와 대결하기보다는 수카르노에 협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적절한 정책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는 수카르노가 교도 민주주의를 선언하며 권위주의로 선회할 때 소련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에게 수카르노 정부에 적극 합류하라고 지시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소련이 제안한 중공업 건설 정책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독립 후 인도네시아가 마주한 수많은 난관과 그로 인하여 발생한 자신의 지도력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모험주의적인 반제국주의 의제에만 몰입하여 소련의 불안을 키웠다. 반면 모택동의 중국은 수카르노의 공격적인 반제국주의 수사에 매우 흡족해했으며, 인도네시아 공산당에서 영향력을 계속해서 확대하고 있었다.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중국 경도가 명확하게 드러나자, 소련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위험한 좌경 모험주의로 간주하게 되었고, 실제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일으킨 성급한 친위 쿠데타가 수하르토의 반격으로 인하여 인도네시아 좌파의 완전한 파괴로 끝나면서 소련은 자신의 불안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경험을 통해 소련은 좌익 세력과 경쟁하는 이슬람의 힘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제3세계 민족 지도자를 무작정 지지하는 것보다는 의회 민주주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 더 안전한 전술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수카르노와 피델 카스트로.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70년 즈음이 되었을 때 소련은 각지의 공산당에게 의회 진출을 통한 권력 장악을 강력하게 권유하고 있었다. 이는 제1세계 노동계급이 조합주의 복지국가에 충성하게 되면서 모색한 현실적인 길이었고, 마오주의를 따르는 좌경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경계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때마침 1970년 칠레에서 집권을 시작한 인민연합(UP)은 소련의 의회주의 전술이 거둔 중요한 승리가 되어주었다. 소련은 칠레의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 정당의 민주적 집권을 실험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발전한 산업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비슷한 전술을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소련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중공업 건설이나 생산 수단 사회화보다는, 생산력 진흥과 중산층 확대와 같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수단을 취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소련은 칠레의 사태 전개에 대해서 여전히 큰 불안감을 품고 있었는데, 집권 인민연합 내부가 당시 세계 좌익 진영을 지배했던 극심한 분열에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민연합은 소련 공산당의 의회주의 노선 및 온건한 사회경제 정책에 확고하게 동조하는 칠레 공산당과, 카스트로주의의 영향 하에서 훨씬 더 급진적인 혁명 노선을 추구하는 칠레 사회당으로 나뉘어 칠레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끝없는 반목을 거듭했다. 아옌데는 이 두 진영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고, 특히 중국과 소련 어느 한쪽을 적대하지 않고 두 국가와 모두 원조 및 무역 관계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옌데의 노력은 소련에게는 칠레가 언제든 좌경 모험주의로 흐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중국에게는 인민연합이 수정주의 경향이 짙어 헌신적 혁명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심어줄 따름이었다. 칠레 공산당과 사회당, 중국과 소련을 가로지르는 분열은 아옌데가 확고한 정치적 지배력을 바탕으로 경제난을 돌파할 정책을 추진할 수 없게 만들었고, 동시에 사회주의 양대 강대국으로 하여금 칠레를 향한 적극적 지원을 꺼리게 했다. 한편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는 아옌데 정권에서 혼란이 가속화되자 기회를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반공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중국과 소련은 반공 정권의 수립과 칠레 사회주의의 패배보다도 칠레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경쟁국의 손에 넘어갈 것을 더 우려하며 형식적인 반발만을 표명할 뿐이었다. 대신 소련은 아옌데의 경험을 되짚으면서, 여전히 온건주의 노선이 타당하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피노체트를 바라보며 사회주의 건설이 미국의 개입으로 언제든지 순식간에 정지될 수 있음을 철저히 의식하게 되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살바도르 아옌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3장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전개되었던 탄자니아의 우자마 실험을 살펴본다. 탄자니아는 소련의 아프리카 정책에 있어서 가장 계륵 같은 나라였다. 탄자니아의 국부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탈식민 운동의 상징적인 지도자였고, 사회주의에 매우 큰 호감을 표명했지만, 그의 정치적 태도는 소련을 만족시킬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니에레레는 영국식 교육을 받았고, 무장투쟁 대신에 영국과의 온건한 타협을 통해서 독립을 이끌었고, 그의 사회주의 개념은 기독교 사회주의와 아프리카 토착 개념을 혼합한 것이었지 레닌주의는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니에레레는 제3세계 운동의 맥락에서 중국과 협력 관계를 빠르게 발전시키고 있었고, 특히 이는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잇는 TAZARA 철도 건설을 중국이 주도하면서 계속해서 구체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1967년에 니에레레가 사회주의 건설을 천명한 아루샤 선언과 사회주의 프로그램인 우자마를 도입하면서, 소련은 니에레레의 실험을 지원하면서 탄자니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의존하기를 원치 않았던 니에레레는 외교적 유연함을 보이며 동독과 소련에 접근하여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각종 원조를 확보하고자 움직였다. 이런 양국의 의사가 맞아떨어지면서, 소련은 전문가를 파견하고 물자를 원조하며 우자마 프로그램에 많은 도움을 주고자 했다. 특히 소련은 1960년대 서아프리카의 사회주의 지향 국가들에 중공업 건설을 조언했다가 철저히 실패한 경험을 반추하며, 농업부터 시작하겠다는 탄자니아의 실험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립’을 내건 우자마 프로그램의 한계는 매우 뚜렷했다. 탄자니아는 소련이나 중국이 실행했던 집단화를 추진할 역량이 없었고, 자립 시도는 탄자니아가 동원할 수 있었던 자원 상황의 절대적 열악함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다. 니에레레는 정치적 동원을 통해서 이를 돌파하고자 했고, 1970년대부터 우자마는 정부에 의한 강제적인 촌락화 정책이라는 강경 노선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의미에서 우자마는 대실패로 끝났고, 자립은 이루어지지 않고 서구와의 무역과 원조에 대한 의존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소련은 우자마와 니에레레에 환멸을 느끼며 다시 사회주의 건설의 청사진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를 둘러싼 고민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탄자니아 사회주의 건설을 천명한 아루샤 선언 기념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우자마가 실패로 끝나고 있던 와중에도 소련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 권역의 확산을 즐길 수 있었다. 1974년 포르투갈 식민 제국이 붕괴되면서, 앙골라와 모잠비크에는 소련이 후원하는 사회주의 성향의 정부가 들어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골라는 독립운동 세력이 극심한 내분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상황만은 아니었다. 앙골라에서는 앙골라민족해방전선(FLNA),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 앙골라완전독립민족동맹(UNITA)라는 세 세력이 경합하고 있었고, 소련은 세 세력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자신이 후원하는 MPLA 내부의 긴장도 관리해야만 하는 복잡한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소련은 일찌감치 MPLA를 지원했는데, 이는 도시 지역의 학생과 지식인을 기반으로 성립된 MPLA가 강한 모스크바 지향성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동시에 앙골라 사회 특유의 맥락인 인종 문제도 개입되어 있었다. 오랜 포르투갈 식민 통치를 거치며 앙골라에는 포르투갈계 백인과 포르투갈과 앙골라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굳건한 지배 계급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앙골라 독립전쟁은 자연스럽게 흑인 민족주의자들이 백인과 메스티소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인종 전쟁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는데, 소련은 제3세계 운동가들에 의하여 종종 북반구 백인 강대국으로 비판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MPLA는 백인, 그리고 특히 메스티소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당이었기에 소련 입장에서는 훨씬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동맹이었다. 소련은 문제의 본질인 반제국주의와 무산계급 해방 운동을 인종 문제로 호도하지 말라고 비판하며, MPLA의 계급주의자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MPLA 내부에서 제기되는 흑인 민족주의적 비판, 북부 전선과 동부 전선 사이의 주도권 다툼은 MPLA를 계속해서 내분으로 몰아넣었으며, 그 과정에서 MPLA가 마오주의에 관심을 표하자 소련은 MPLA와 관계 단절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포르투갈 정권이 붕괴되고, 앙골라의 독립이 가시화되자 소련은 다시 MPLA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는데, 소련 입장에서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MPLA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과 쿠바의 지원으로 앙골라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물론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도전마저도 격퇴한 MPLA는 이제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천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인도네시아, 서아프리카, 칠레, 탄자니아 등의 여러 실험을 거치며 사회주의 건설을 20년 가까이 고민한 소련의 조언은 생산력 증진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외국 자본의 투자를 유치하라는 것이었다. 이 조언은 사회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소련이 성급하게 사회주의 건설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언했다가 마주한 숱한 난관을 통해 도출된 합리적 조언이기도 했다. 소련은 비사회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답도 갖고 있었다. 소련이 MPLA에 제시한 다른 조언은 강력한 레닌주의 전위 정당을 통해 국가를 철저히 장악하라는 것이었다. 당이 국가의 부와 생산 수단을 언제든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만 있다면, 경제 정책도 때가 되면 사회주의로 빠르게 선회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당의 확고한 장악력은 경제적 전환기에 나타날 정치적 반발, 외국 세력의 개입, 사회적 혼란을 관리할 수 있는 비결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마르크스 없는 레닌’ 전술은 소련 사회주의의 해체를 거치며 MPLA를 국가의 부를 전부 독점한 강력한 특권 계층으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9년부터 2017년까지 집권한 MPLA 지도자 두스 산토스의 딸 이사벨 산토스. 어머니는 러시아인으로 당시 소련 바쿠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의 가장 큰 부호 중 하나로 꼽히며, MPLA의 혁명이 '타락했다'는 비난의 상징으로도 유명하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마지막 사례인 이란에서 저자는 제3세계 혁명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소련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종교를 본래 인민의 아편으로 취급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따라 소련은 자국에서 강력한 무신론, 반종교 정책을 추진했었다. 종교는 사회 진보를 가로막고, 피착취계급이 계급 모순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반동적 계급의 유용한 도구였다. 그러나 소련은 세계 각지의 탈식민 운동이 종교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종교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를 둘러싸고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각지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소련이 현지의 종교적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신론 제국’으로 비난받는 상황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1960년대를 거치며 이슬람 세계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종교가 탈식민 세계의 사회정의와 계급문제에 관심을 표하게 된 것은 소련이 종교에 대한 입장을 재고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 사회주의와 해방신학은 종교적 언어로 사회적 평등과 착취계급에 대한 저항을 촉구했는데, 소련은 이들을 바라보며 종교적 언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진보적 민족주의의 한 형태로서 간주하기 시작했다. 종교에 대한 소련의 태도 변화는 1979년에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혁명이 시작되자, 소련이 시아파 성직자들을 지지하게 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이 시점에서 시아파 이슬람주의는 강한 사회 진보의 언어로 혁명을 정당화하고, 평등 사회를 향한 새로운 체제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소련은 인도네시아에서 관찰한 이슬람교의 막강한 영향력과 진보적 잠재력, 그리고 수하르토와 피노체트를 통해 배운 미국 주도 쿠데타의 위협을 반추하면서,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란 투데당에 호메이니와 함께 이슬람 혁명을 수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는 진보적 운동으로서 종교의 가능성을 인정했으나, 이슬람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잠재력은 철저히 무시하면서 내린 심각한 오판이었다. 소련과 동독의 관찰자들은 항상 신을 찾는 성직자들이 20세기 근대 국가를 운영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소련 관찰자들은 국가 운영 능력이 없는 성직자 체제는 현실적 한계를 마주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으니, 성직자들이 일깨운 사회 진보에 대한 열망을 사회주의자들이 인수하면 이란의 사회주의 혁명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사이의 불안정한 구간에서 미국 주도 하의 반혁명 세력을 막기 위해서 투데당은 성직자들과 같은 편에 서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주의에 대한 소련의 무지를 드러내는 결정이었다. 20세기 내내 이슬람주의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었고, 특히 이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경쟁하고, 반둥 정신이나 마오주의를 의식하며 이미 정교한 혁명 사상으로 발전하고 있던 터였다. 소련은 이란의 좌파들에게 이슬람의 언어를 활용하여 대중에 다가가는 것을 권장했지만, 서구적 교육을 받은 좌파 지식인들이 코란과 하디스를 평생 공부하며 갈고 닦은 동시에, 문화적 고유성과 도덕적 경제에 대한 현대적 이론까지 겸비한 이슬람 성직자들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련은 자신이 상황을 매우 잘못 판단했음을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호메이니가 정국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이란 좌익 세력에 대한 잔인한 숙청에 나설 때에야 깨닫게 되었다.

소련에서는 누구도 성직자들이 20세기 현대 국가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호메이니가 정초한 성직자들의 지배는 21세기에도 견고하게 살아남았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결론에서 저자는 제2세계와 제3세계의 상호작용, 그 과정으로서 사회주의 건설이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묻는다. 저자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신념 체계가 아니라,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준거이자 지침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소련이 밀려드는 정보와 사건의 홍수 속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준 나침반이었다. 소련 정책 결정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큰 인지적 틀 속에서 현지의 상황과 역사적 전개를 수용하고 학습하며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개념을 진화시켜 나갔다. 그 진화는 경제에서 시장주의의 수용, 정치에서 레닌주의 정당론의 공고화, 문화에서 전통과의 타협으로 특징 지어졌다. 서아프리카에서 중공업 건설을 위한 지원, 탄자니아의 농업 자립화의 실패는 앙골라에서 외국 자본의 투자 유치를 허락하게 했다. 그리고 이는 1970년대에 동유럽과 중국에서 시작된 시장 경제 수용과 명백히 상호작용하는 사회주의의 진화 과정의 일부였다. 한편 레닌주의 정당론은 경제적인 유연함을 통제할 수 있게 하고, 내외부의 반혁명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도구였다. 소련 모델로 성립된 제3세계의 패권 정당들은 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해서 규율을 갖춘 레닌주의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소련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에도 이 정당들은 국가 자원, 경제, 사회에 대한 막강한 통제력을 자랑하며 여전히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끝으로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을 사회주의의 동맹으로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과정에서 소련은 제3세계 각지의 문화적 민족주의와 전통 사상의 현대적 재탄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실제 이 사상들은 해방운동의 경쟁자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의식하며 자신들의 신념 체계를 발전시켜 나갔고, 혁명기에 널리 퍼진 경제적 평등이나 사회 진보에 대한 이상은 후퇴했을지라도 서구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강력한 명분을 통해서 오늘날의 세계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를 받아들인 중국과 21세기에도 굳건한 신정 체제를 유지하는 이란, 그리고 레닌주의의 유산을 이어받은 아시아-아프리카의 많은 정권은 제1세계의 관계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제2세계와 제3세계 간의 상호작용의 산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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