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된 산업 자본주의 국가가 자체적인 계급 모순으로 붕괴하여, 무산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가 탄생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핵심 교리였다. 하지만 실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곳은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 수준이 상대적으로 미비했던 러시아였다. 이후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진로 또한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정반대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발전된 산업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이익을 공유하는 복지국가가 자리 잡았고, 혁명의 전망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대신 소련이 스탈린 시기에 거둔 눈부신 성취는 역설적으로 선발 국가들이 아니라 후발 국가들의 혁명가들을 사로잡았다. 후진적이었던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통해 현대성을 성취하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해냈다면, 러시아보다 낙후한 국가에서라도 얼마든지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고,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선발 국가들을 추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소련 또한 일찌감치 마르크스주의의 교리가 실제 현실에서 적용되는 양상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러시아 혁명기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문제 의식을 가졌던 소련 공산당은 산업 자본주의가 전혀 발전하지 못한 비서구 세계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시작된 탈식민화의 물결과 ‘제3세계’의 등장은 비서구의 저개발 지역을 통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음을 뜻했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현대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제3세계에서 경쟁을 시작했고, 소련은 탈식민 지역이 제국주의 세력과 봉건적 지배 계급을 무찌르고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올바른 지도와 적절한 지원을 제공해야만 했다.

제3세계에서 중소 경쟁을 다룬 저자의 전작, "그림자 냉전: 제3세계에서의 중소 경쟁"

하지만 실제 소련이 탈식민 국가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제3세계의 사회주의 건설이란 상상 이상의 난관을 돌파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제레미 프리드만의 Ripe for Revolution: Building Socialism in the Third World (2022)는 바로 이런 난관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향한 탈식민 국가들과 소련의 열망은 수많은 지역적 맥락이 개입되면서 굴절되었고, 현지의 혁명가들과 모스크바의 당국자들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와 특정 국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오해를 빚고, 또 충돌하기도 했다. 소련은 냉전의 적대적 경쟁자인 미국의 개입, 사회주의 종주국을 둘러싼 중국과의 경쟁을 항상 의식하며 행동해야 했고, 이는 소련의 행동반경과 선택지를 크게 제약하는 요소가 되었다. 또한 공산당의 정치적 장악력이 떨어지고, 자본과 기술의 발전 수준이 크게 낮은 지역에서 어떻게 하면 발전된 경제를 건설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공고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해진 정답은 없었다. 따라서 소련이 선택해야만 했던 유일한 길은 실제 제3세계의 사회주의 건설을 지원하고 감독하며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이 수많은 시행착오는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소련의 지식인과 정책 결정자들에게 교훈을 안겨주었고,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와 역사적 경험, 현지의 맥락 사이에서 끝없는 조정을 거치며 계속해서 진화해 나갈 수 있었다. 저자는 냉전 시대를 단순한 ‘미국 패권의 절정’, 혹은 ‘미소 양대 초강대국의 시대’로 규정하기보다는, 현대 세계의 형성에 참여한 수많은 제2세계와 제3세계의 행위자들의 영향과 유산까지 종합하여 더욱 온전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위해서 다시 조명되어야 할 역사적 경험이 바로 제2세계와 제3세계의 상호작용을 통한 사회주의의 진화라는 것이다.

저자가 사회주의의 진화를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한 사례는 다섯 개로, 각각 인도네시아, 칠레, 탄자니아, 앙골라, 이란이다. 수많은 사례 중에서 이 다섯 개 국가가 선택된 이유는 소련 당국자들이 제3세계 정책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 사례들임과 동시에, 공산당의 확고한 영향력이 작동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공간이었기에,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과 시행착오가 극명하게 발생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책은 이 다섯 국가의 사회주의 경험을 순차적으로 제시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제3세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이 진화하는 역사적 개념이었기 때문인데, 저자는 소련과 사회주의 세계가 앞선 실험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을 항상 다음 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에 참조할 주요한 근거로 삼았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개별 장은 현지의 역사적 맥락과 그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형성을 넓게 개괄한 뒤에, 각 국가에서 전개되는 사회주의 건설의 결정적 순간들을 세부적으로 보여주고, 해당 국가의 경험을 통해 소련과 사회주의 세계가 어떤 교훈과 학습 효과를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