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은 어떻게 싸우는가? (2): 체첸전에서 남오세티아전까지

러시아군은 어떻게 싸우는가? (2): 체첸전에서 남오세티아전까지

처참한 암흑기에서 느린 재건으로

임명묵

소련군의 유산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이들로서는 불운하게도, 러시아는 아직 한참 고난의 세월을 더 보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전개된 제1차 체첸 전쟁은 러시아가 어디까지 나락으로 갈 수 있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전시장이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맞물려 일어난 체첸의 독립 선언을 옐친 정부로서는 용납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러시아군이 체첸 반군을 진압하고자 급파되었다. 러시아군 상부를 포함하여 누구나 러시아군의 손 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아무리 소련 해체로 혼란이 극도에 달한 상태라지만, 직전까지 미군과도 경쟁하던 러시아군이 체첸의 작은 지방 반란 정도는 너끈히 제압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체첸도 2차대전을 겪고 3차대전을 대비했던 군사 동원 국가인 소련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체첸 반군 다수는 전직 소련군 장군 출신인 조하르 두다예프부터 말단 병력까지 소련군 복무 경력이 있었고, 소련제 무기의 운용법과 약점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체첸이라는 자신의 고향에 기반을 둔 무장 세력이었다. 당연히 현지의 언어, 문화, 정치적 상황 등 정보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채 러시아 진압군에 게릴라전을 강제할 수 있었다.

전직 소련 공군 소장에서 체첸 반군 지도자가 된 조하르 두다예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94년 12월 31일, 이런 상황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러시아군은 전차, 포병, 공군을 통한 대규모 작전과 전면전에서의 우위를 믿고 주요 병력을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로 진격시켰다. 러시아군은 간신히 그로즈니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참패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징집병들은 영문도 모른채 체첸까지 끌려와 제대로 된 지휘도 받지 못하고 시가전에서 급습을 당해 죽어나갔고, 제대 간 통신망은 엉망이어서 고립된 전차 병력이 체첸군의 RPG에 맞고 무수히 터져나갔다. 러시아군에 막대한 손실을 강요한 체첸군은 유유히 도시를 빠져나가 폐허가 된 그로즈니를 넘겨주고 산악에서 항전을 지속했는데, 여전히 유럽 평야에서 나토를 싸우는 것만 훈련을 받았던 절대 다수의 러시아군은 바로 직전 아프가니스탄의 경험은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체첸군과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를 벌였다. 소련이 해체되고 군이 대혼란을 경험하는 와중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전훈이 면밀히 분석되어 체계적으로 교리에 적용될 여유는 없었다. 결국에 전혀 훈련과 조율 없이 벌어진 게릴라 소탕전에서 러시아군이 벌인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잔학 행위는 러시아 시민사회와 국제사회의 규탄을 불러왔다. 최종적으로 체첸 게릴라가 산악에서 튀어나와 그로즈니의 러시아 점령군을 포위하면서 러시아군은 실질적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옐친은 체첸에 굴욕적으로 자치권을 넘겨주는 협정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로써 체첸은 러시아 권력의 묘비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제1차 그로즈니 전투 당시 기도를 드리는 체첸 시민.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러나 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러시아는 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올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베오그라드 공습에 항의하며 비행기를 돌린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의 결정은 러시아가 여전히 독자적인 강대국으로 남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사건이었다. 구소련 지역에서도 1990년대에 러시아군은 타지키스탄 내전과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등에서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비정규전 환경에서 새로운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한편 자치권을 주며 임시적인 평화가 자리 잡았던 체첸에서는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승리를 거둔 체첸 공화국은 오랜 뿌리를 지닌 부족 알력으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와 교류하며 이슬람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전사들은 점점 통제를 따르지 않는 독자적인 무장 활동을 시작했다. 체첸군이 인근 다게스탄을 침공하고, 모스크바 아파트에서 체첸 소행으로 보이는 폭탄 테러가 일어나자, 크렘린은 북캅카스를 안정화시키고 체첸에서 통제권을 다시 확보할 수 있는 설욕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러시아군을 지휘할 인물은 보드카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로 있는 옐친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총리 자리에 오른 KGB 출신의 미지의 인물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바로 이때문에 모스크바 아파트 폭탄 테러와 제2차 체첸 전쟁이 푸틴으로의 권력 이양을 위해 올리가르히들이 진행한 의도된 연출이었다는 리트비넨코의 음모론이 나왔다.)

제2차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5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훨씬 더 체계적이고, 또 무자비하게 작전에 나섰다.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를 상정하지 않고 막연하게 진압만을 노렸던 1차 전쟁과는 달리, 2차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체첸에서의 확실한 중앙 권력 회복을 노리며 계획을 설계했다. 첫째로는 군사적 힘을 통해 그로즈니를 필두로 한 도시 지역을 장악하고, 둘째로는 게릴라전을 펼치는 캅카스 산악 지역을 장악해야 했다. 러시아군이 1차 전쟁에서 그로즈니를 천신만고 끝에 점령했어도 배후 산악, 농촌 지역 통제가 실패해서 처참한 패배를 맞이해야만 했던 경험을 반영해, 크렘린은 체첸 현지의 협조자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여기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흐마트 카디로프와 람잔 카디로프 부자였다. 당초 체첸 반군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던 아흐마트 카디로프는 반군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와 갈등을 빚은 끝에 모스크바 중앙 정부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카디로프는 현지의 언어, 문화, 부족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도를 제공하며 체첸의 신속한 안정화와 반군 진압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후 아흐마트 카디로프는 사실상 모스크바에서 전적인 자율권을 추인받은 사트라프(태수)로 군림했고, 사망 이후에는 아들인 람잔 카디로프가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하기까지 했다.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과 사트라프 아흐마드 카디로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산악 지역에서 본격적인 대게릴라 소탕전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체첸의 수도인 그로즈니를 장악해야만 했다. 성급히 중화기를 도시에 진입시켰다가 매복 기습에 당했던 이전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러시아군은 원거리에서 공군, 포병, 미사일을 총동원하여 그로즈니 시가지를 가루로 만들었다. 초전 제압을 완수한 뒤 러시아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와 유사하게 공격 헬리콥터와 특수부대, 장갑차가 주가 되는 기동성 있는 자율적 부대를 그로즈니에 진입시켰고, 시가전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진격 속도에 치중하기보다는 도시 주요 거점을 단계별로 장악하고 통제를 공고화하며 체첸군을 고사시켜 나갔다. 시가전의 유기적 작전 수행을 위한 통신과 지휘 통합도 1차 전쟁과 달리 크게 진전되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러시아군은 여전히 비효율적이었고, 숱한 실수와 낭비가 발생했고, 이전에 비해서 민간인 피해도 훨씬 더 많이 속출하며 수많은 참상이 반복되었다. 러시아의 양심적 언론인인 안나 폴리트콥스카야의 탐사 보도가 러시아 각지와 세계 전역으로 전파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어쨌든 러시아군은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체첸의 통제권을 재확립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 과정에서 현대전과 비정규전 수행의 중요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과단성 있게 자원을 동원하고 조직을 재편하며 무자비한 복수를 가함으로써 러시아는 자신의 건재함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었다. 이를 지휘한 주역인 푸틴은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강한 지도자로서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를 복구해내겠다는 푸틴의 선언은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2000년부터 빠르게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가가 안정화되고, 에너지, 광물 자원을 바탕으로 한 서구와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푸틴은 무리한 군사적 활동에 집중하기보다는 소련군의 폐허를 신속히 재건하는 데 집중했다. 2000년에서 2008년까지 러시아군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과 공조를 한다는 명분으로 북캅카스에서 여전히 게릴라전과 테러리즘 활동을 벌이는 반군을 철저하게 진압하는 데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푸틴은 러시아 중앙에서 올리가르히를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고, 검찰-군부-정보부가 결합한 ‘실로비키’ 체제로의 이행에 박차를 가했다. 자원에 대한 국가 통제라는 제1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한 푸틴은 인프라 정비, 사회복지, 에너지 산업에 재투자 등 다양한 방면으로 국가 지출을 효율화하고 재편했는데, 여기에는 자신이 장악한 군 조직의 재건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푸틴은 대조국전쟁의 기억을 더 자주 환기하며 러시아에 애국주의 문화를 불어넣었고, 장교 처우 개선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며, 결정적으로 소련 시절 군산복합체의 유산을 지켜내는 데 많은 자원을 투입했다. 아직 러시아군을 떠나지 않은 군산복합체 산하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붙잡아두고, 독일, 프랑스 등과 방산 협력을 통해 구시대적 군산복합체의 기술적 수준을 현대화하는 일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동시에 투자와 복구에 국방비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하여 대규모 징집병을 감축하고,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인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계약병의 비중을 늘렸다. 푸틴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러시아군은 1990년대부터 경험한 끝도 없는 추락을 일단 멈추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과 2003년 이라크에서 미군이 보여준 압도적 공중 우세와 첨단 군사기술에 주목한 러시아 군산복합체는 장비의 양과 규모를 줄일지라도 기술적인 수준에서 절대적 열위에는 놓이지 않게끔 R&D 경쟁력을 지켜내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군은 500만 소련군의 유산을 최종적으로 내려놓고 현대전에 걸맞은 전문화된 군대로 이행하는 중요한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대조국전쟁 60주년 퍼레이드. 자크 시라크와 조지 부시와 함께한 푸틴.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8년간의 재건기는 러시아군의 쇠락을 간신히 막은 시기였지, 현대전에 적응할 수 있는 전면적 전환을 이룬 시기는 아니었다. 러시아군의 여전한 취약점은 그루지야와 맞붙은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남오세티아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양적, 질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인구가 400만이 채 안 되는 소국 그루지야를 신속히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실제 작전 수행은 전혀 매끄럽지 못했다. 공군과 지상군은 제대로 조율되지 않아 오폭이 속출했고, 지상군끼리도 통신과 지휘가 헝클어져 좁은 도로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해 진군이 늦춰졌고, 훨씬 열세인 그루지야군의 반격에 뼈아픈 타격을 입기도 했다. 따라서 남오세티아 전쟁은 러시아가 전략적 차원에서는 무력 투사의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기는 했어도 군사적, 전술적으로는 도리어 러시아의 취약점을 드러내기만 했다. 외부 관찰자들은 러시아군이 여전히 덩치만 크지 정교한 작전을 제대로 완수하기엔 역부족이라는 믿음을 강화했다.

가구상 출신 국방장관, 아나톨리 세르듀코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남오세티아 전쟁은 푸틴이 2001년부터 2007년까지 6년간 자신을 따라 군 재건을 수행한 국방장관 세르게이 이바노프를 교체한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바노프는 푸틴과 같은 정보부 출신으로서, 군에 대한 전문성은 떨어져도 정치적 충성심을 확고히 증명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푸틴이 이바노프의 후임으로 임명한 신임 국방장관 인사는 더욱 파격적이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국방장관에 재임한 아나톨리 세르듀코프는 가구회사 CEO 출신에, 회계, 재정, 세무 전문가로서 군은커녕 실로비키 전반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푸틴이 세르듀코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는 그래서 더욱 명확했다. 군 외부의 민간 인사를 통해서 러시아군을 훨씬 더 효율화하고 전문화할 수 있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세르듀코프의 임명 이듬해 발생한 남오세티아 전쟁은 러시아군이 여전히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세르듀코프의 개혁 방향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유사한 조직 철학에 기초하여 구조조정을 오랜 기간 진행했던 미군과 나토식 군대 운용법을 러시아군에 상당 부분 도입했다. 징집병의 복무 기간을 12개월로 줄여 규모를 더욱 감축했으며, 장교와 장성들도 옷을 벗게 하여 조직을 대폭 경량화했다. 세르듀코프 체제에서 러시아군은 소련식 대규모 군대보다는 서구식 전문화된 군대로의 이행을 추구했다. 그 결과 이바노프 시절부터 추진된 계약병(콘트락트니키) 위주의 병력 편성과, 전문성을 갖춘 부사관 확충이 시행되었다. 사단 중심 체제에서 여단 중심 체제로 전환하며 기본 지휘 단위를 더 소규모로 쪼개 유연성을 확보하고자 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기술관료 중심의 서구화와 전문화 개혁인 ‘현대화(Modernizatsiya)’ 정책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세르듀코프 개혁은 민간 인사의 구조조정 조치에 대한 군 조직 전체의 반발과, 서구화 개혁 과정에서 발생한 진통과 부적응으로 인해 가시적으로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세르듀코프 개혁은 러시아군이 새로운 전장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거쳐야만 했던 진통이었으며, 동시에 경량화와 구조조정을 통해 이후의 군사력 확충과 러시아식 현대전 교리 수립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남오세티아 츠힌발리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러시아의 보스토크 대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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