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가? - (1)

푸틴은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가? - (1)

'약한 독재자'가 택한 전쟁

임명묵
  1. 들어가며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 연방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중립화, 비무장화, 탈나치화라는 목표와 함께 선언한 ‘특수군사작전’이 시작되었다. 2024년이 끝나가는 현재, 전쟁은 발발된 지 1000일을 지나고 있으며, 1000일 동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과 글로벌 공급망의 위기, 그로 인하여 초래된 인플레이션, 중동과 미국까지 포괄하는 연쇄적인 지정학적,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

한편 미국에서 대표적인 우크라이나 회의론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다시 재선되면서, 이제 각국의 공론장에서 종전 협상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전쟁 초기에 서구에서는 침략국 러시아를 향해 격렬한 분노와 열광적인 우크라이나 수호 의지, 사상 초유의 경제 제재를 통해 러시아를 굴복시키겠다는 목표를 드러냈으나, 실제 전장의 현실은 서구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우는 비서구 개발도상국들은 초기에 일시적으로 러시아를 비난했지만, 다양한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를 근거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빠르게 회복했다. 러시아 경제는 제재에 대한 일정 정도 내구성을 갖추었음이 드러났고, 2022년 가을에 있었던 30만 명의 부분동원령 발효 이후에 러시아 사회의 내적 동요도 가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반대로 군수 산업 기반이 취약한 우크라이나는 지속적인 군수품 결핍에 직면하여 전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해 나갔고, 2024년에는 요새도시 아브데예프카 함락 이후 돈바스에서 지속되는 러시아의 전방위적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실패했다. 우크라이나가 크림 반도를 포함한 1991년의 국경을 되찾는 것은 고사하고, 현재 러시아의 점령지를 수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어느 정도는 모두 만족시켜줄 수 있는 협상안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현재 트럼프 당선인의 공언이다. 이에 미국이 과연 협상안을 만들 수 있을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제안에 동의할 수 있을지, 동의하지 않으면 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관한 다양한 추측과 분석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종결 논의는 주로 작금의 양국 상황과 전황을 근거로 전개되기에, 애당초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분석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가 공언한 전쟁 목표(중립화, 비무장화, 탈나치화)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어째서 전쟁이 2022년 2월 24일에 발발했는가라는 발발 시점에 관한 고찰 없이는 전쟁 당사국들을 만족시킬 협상안이 도출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실제 협상안은 양국, 특히 현재 전장을 주도하고 있는 러시아가 원하는 바, 즉 전쟁 이전과 전쟁 시작 단계에서 불거진 요인과, 러시아가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전장의 구체적 상황, 그리고 전쟁 지속력을 보장해주는 러시아 국가의 역량을 포괄적으로 고려한 결과로 도출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2022년 2월 24일이라는 시점에 침공했는가? 이에 관해서는 전쟁 당사자들인 서구와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가지의 서사가 충돌한다. 우크라이나 및 서구의 서사에서는 주로 독재자 푸틴이라는 인적 요인과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사회를 지배하게 된 제국 해체의 상실감과 여전히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제국적 열망이라는 러시아의 문화적 요인을 근거로 제시한다. 푸틴은 탈소비에트 이행기의 혼돈 속에서 국민에게 안정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부패한 자원 추출 경제를 크렘린에 완전히 종속시켰으며, 러시아 정치와 경제는 푸틴이 이끄는 ‘마피아 단원들’에 의하여 사유화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침체하고 약화되어 가는 푸틴 체제는 권력 유지를 위해 권위주의적인 억압과 파시즘을 떠올리게 하는 대중 동원에 의지하게 되었다. 특히 후자를 위하여 푸틴은 페미니즘 및 성소수자 운동 탄압, 소수민족 권리와 지방자치 회수, 국내의 사회 개선에서 보인 무능력함을 국외에서 벌이는 모험적인 군사 활동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행태를 발전시켰고, 이를 이반 일린이나 알렉산드르 두긴과 같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그를 통해 정당화했다. 탈소비에트 공간, 그중에서도 우크라이나는 그런 의미에서 푸틴에 매우 중요했는데, 러시아와 역사 및 언어를 공유하는 우크라이나에서 유럽식 자유민주정이 들어설 경우에 내적으로 취약한 푸틴의 통치에 근본적인 도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감정적인 영역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탈소비에트 공간이 계속 러시아의 제국적 궤도에 남아 있어야 하며, 러시아의 ‘형제국’인 우크라이나는 더더욱 이탈할 수 없다는 푸틴과 엘리트 그룹, 사회 전반이 공유하는 제국주의적 감수성이 근외(near abroad)에서의 연속적 충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렌지 혁명, 유로마이단 혁명, 크림 합병과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침공은 모두 ‘더 동쪽으로’ 향하는 푸틴주의 러시아에 맞서 ‘더 서쪽으로’ 향하는 우크라이나의 필연적인 이별 요구에 러시아가 피해의식에 입각한 고립을 자처하는 과정이다. 이 맥락에서 러시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별 민족으로서 우크라이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다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이며, 중립화 요구는 그를 위한 수단이다.

당연하게도 러시아의 서사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이후에 지구적 강대국으로서 역할을 완전히 포기했다. 다만 그것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종속적인 지위로 참여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러시아는 자신의 주권 영역에서 온전한 자율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그러나 서구는 배제적인 군사 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끊임없이 동유럽으로 확장하면서, 국제 질서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러시아의 군사적 기반을 침식시켜 나갔다. 러시아에게 이것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해체 당시에 나토를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고 했던 미국 행정부의 약속이 순식간에 뒤집힌 배신행위였다. 2014년부터 본격화된 러시아의 해외 군사 개입은 더는 일방적인 피해를 감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당한 결정이었다. 대표적으로 시리아에서 아사드 정권을 PMC와 공군을 통해 지원한 러시아는 서방이 시리아에서 극단적 지하드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전쟁 개입을 정당화했다. 이후 러시아의 불만 사항은 문화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는데, 푸틴은 서구의 문화적 진보주의가 러시아 사회의 근간인 대가족주의와 여러 민족의 화합을 해체하고 사회를 혼돈으로 몰아넣는다고 비난했다. 지정학적, 문화적 불만은 우크라이나에서 결정적으로 포개졌다.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확장은 모스크바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러시아의 서쪽 변경에 전면적인 안보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서구의 침입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혐오증과 퀴어 이데올로기의 이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구는 우크라이나에서 스테판 반데라로 대표되는 나치 부역자를 숭상하는 네오나치 조직을 지원했으며, 동슬라브 문화와 정교회의 고향인 우크라이나를 문화적 타락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서구의 이런 시도는 역시 오렌지 혁명, 유로마이단 ‘쿠데타’, 돈바스에서의 러시아계 주민 탄압으로 지속적으로 이어진 바, 러시아는 부득이하게 ‘특수군사작전’을 통해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고 러시아 국가 이익을 수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푸틴이 전쟁의 목표를 중립화, 비무장화, 탈나치화로 설정한 이유다.

두 설명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전쟁 당사국들의 입장이 반영된 극도로 정치화된 설명이기도 하다. 이 설명들에서는 푸틴의 개인적 야욕과 러시아인들에 내재된 전체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습성, 혹은 서구 권력가들의 세계지배 음모가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고, 서구와 러시아 사이의 마니교적 투쟁을 초역사화한다. 러시아는 언제나 동유럽을 노려왔고, 서구는 언제나 러시아를 해체하려고 했다. 이 초역사적 설명에서 푸틴 정권과 서구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매우 좋은 밀월 관계를 보냈고, 2010년까지도 몇 가지 충돌에도 불구하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푸틴이 프랑스와 독일과는 전쟁 직전인 2021년까지도 매우 중요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했다는 명백한 사실들은 망각된다. 게다가 서구 혹은 러시아의 본질이 우크라이나 위기를 계속 악화시키며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목적론적 서술은 2013년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푸틴이 전면적인 침공 대신에 크림과 돈바스에서의 제한적인 군사 개입에 머무른 이유, 그리고 하필이면 2021년부터 우크라이나 위기가 시작된 이유, 그리고 타결 직전까지 갔던 2022년 4월의 이스탄불 평화 회담에 푸틴이 적극적이었던 이유도 설명하지 못한다(푸틴이 약 8년간 제재에 대응하며 전쟁 능력을 키워갔다는 실용적 설명을 제외하면). 결국에는 전쟁의 동기와 발발 시점을 설명해주는 원인들을 알기 위해서는 푸틴 정권의 성격과 그가 서구가 맺어온 관계에 맥락을 부여해야 하고, 갈등의 무대인 우크라이나에서 실제 벌어진 정치적 역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푸틴 정권의 성격과 대서방 관계

21세기 러시아를 다룰 때, 사반세기 동안 집권하고 있는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인물을 구조적 요인에 종속된 주변적 요소로 치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서구에서는 러시아는 푸틴 개인의 이해관계와 성격, 선호를 바탕으로 러시아를 분석하고자 하는 경향이 특히 더 크다. 소련 이후 러시아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 이해는, 혼란스럽지만 정치적 자유 증진과 시민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던 옐친 시기의 흐름이 푸틴에 의해서 반전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푸틴은 옐친 시기의 가장 큰 오점인 무분별한 사유화와 그로 인해 탄생한 강도 재벌들이 구축한 체제를 물려받았으며, 강도 재벌을 굴복시키고 자신을 둘러싼 실로비키 마피아에게 이권을 다시 재분배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 시스템이 다시 중앙집권화되고, 러시아 경제가 크게 의지하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의 혜택을 입어 러시아 사회에서도 푸틴에 대한 지지가 폭넓게 형성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푸틴 측근들에 의해 사유화된 국영기업에 의지하는 러시아 경제는 다각화와 혁신 기반 성장에 실패하였다. 러시아 경제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산층 기반의 시민사회가 폭넓게 거버넌스에 참여해야 하고, 푸틴과 마피아 측근의 영향력은 자유주의적 정치 제도, 특히 경쟁적 선거를 통해서 견제되어야 했다. 이런 제도적 보장 위에서야 민간 부문의 혁신과 생산성 향상이 뒤따를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를 사유화한 크렘린의 보스들은 이를 허락할 수 없었고, 러시아는 언젠가는 끝날 화석연료를 붙잡으며, 인구학적 위기와 중국의 부상 등의 도전에 대처할 수 없이 쇠락해갈 것이 분명했다. 즉, 러시아의 공격적인 행동은 필연적 쇠락을 마주한 권력 엘리트가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국제질서를 교란하는 ‘불량국가’ 증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권력 엘리트들은 러시아의 쇠락을 자신들의 무능에서 찾지 않고, 서구의 끊임없는 괴롭힘에서 찾으며 복수심까지 불태우고 있었다.

이러한 서술은 21세기에 러시아와 푸틴 정권이 보인 여러 활동들을 일정 부분 설명해줌에도, 권력 구조와 관계된 여러 사실들이 누락되기에 온전한 설명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첫째 문제는 1990년대의 옐친 시기와 2000년대의 푸틴 시기의 단절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이다. 물론 항상 만취 상태였던 늙은 옐친과 카리스마적인 젊은 푸틴의 대비는 러시아가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정치경제 구조에서 본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서구에서는 자유주의 제도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경향으로, 옐친 시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언론과 활발한 시민단체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미 소련 시기 국유 재산을 사유화하여 등장한 올리가르히가 사실상 옐친의 측근으로서 국가 정책의 방향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 자유언론과 시민사회의 영향력을 평가절하하게 만드는 이 시기의 특징은 핵심 올리가르히가 민영 방송국을 중심으로 한 언론 제국을 운영하는 데 있었다. 블라디미르 구신스키의 NTV와 보리스 베레좁스키의 ORT는 러시아 전역의 여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이들은 1996년 옐친의 재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자신들에 유리한 정책을 크렘린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었다. 1991년 소련 보수파의 8월 쿠데타에 맞섰던 옐친은 이미 1993년에는 국회의사당을 포격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올리가르히의 국유 자산 약탈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상태였다. 즉, 옐친 시기가 푸틴 시기에 비해 더 자유주의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유화를 통해 등장한 과두재벌이 정치권력과 합일하며 등장한 탈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 구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었다. 이 체제는 자유민주정과 시장경제로 이어지기보다는 정경합일의 정실 자본주의로 미끄러질 개연성이 너무나도 높았다.

옐친에서 푸틴으로 권력이 이행되었을 때는 정반대의 수사가 나타난다. 푸틴에 비판적인 시각에서 푸틴은 옐친 시기에 그나마 남아 있었던 자유민주정의 희망을 이행기의 혼란을 발판 삼아 짓밟은 국가자본주의자다. 반대로 푸틴 통치에 러시아에서 나타난 급속한 경제 성장과 중산층 성장, 각종 사회 지표의 개선은 푸틴이 국가 위에 날뛰는 올리가르히를 제압하고, 중앙집권적 정부를 부활시켜 국가에 질서를 회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명도 있다. 이 두 설명 모두 푸틴이 자유주의적인 옐친 시기와 대별되는 권위주의적인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전제하며, 옐친과 푸틴의 단절을 강조한다.

실제로 푸틴이 집권 초기에 이루어낸 빠른 재건은 원자재 가격 상승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분권화되어 있던 권력을 다시 중앙집권화하고, 올리가르히 영향력을 통제하며 러시아에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푸틴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었다거나, 올리가르히를 정부에 완전히 종속시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초 푸틴은 베레좁스키에 의하여 옐친 시기에 만들어진 정치경제 구조를 상속받은 인물로 등장했다. 그 역시 엘리트 서클의 내부자였던 푸틴은 다른 올리가르히들을 제압하기는 했으나, 모든 올리가르히를 정부 조직에 완전히 종속시키며 일방적인 명령을 내릴 정도로 권력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물론 올리가르히 사이에서 권력 배분에 중대한 변화가 있기는 하였다. 옐친 시기에 통신과 금융을 통해 권세를 누리던 구신스키와 베레좁스키는 몰락했고, 대신에 원자재 시장에 참여하는 석유, 천연가스, 광물 업자들이 더 중요한 자본가로 부상했다. 푸틴은 원자재 기업 국유화에 동의하는 전제 하에 후자의 올리가르히를 포섭했고, 자신의 권력 우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올리가르히를 제거한 뒤 자신의 측근 그룹에 그들의 자산을 전리품으로 분배하면서 권력을 다졌다. 이것은 안정적인 정치경제 질서를 만들어내려는 푸틴과 사유화의 유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올리가르히 사이에 이루어진 대타협이었다. 대중에게 인기를 얻어내는 몇몇 올리가르히 ‘사냥’이 있었지만, 실제 푸틴은 집권 기간 내내 올리가르히 사이의 이해관계 조정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해야 했다. 푸틴에게 국내 자본을 동원하여 러시아 사회에 임무를 부과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역량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푸틴 체제는 중국식의 국가자본주의로 분류하기 어려웠다. 옐친 시기 정치경제 구조의 지속은 푸틴 정권이 보인 초기의 놀라운 성과와 후기의 저조한 성과를 설명한다. 푸틴은 초기에 옐친 시기의 혼란을 정상화하고, 원자재 수출로 얻은 자본을 투여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상황을 빠르게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푸틴에게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러시아가 원자재 수출 의존을 넘어서는 경제적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고, 집권 후기 푸틴 정권은 10년 이상의 지루한 현상 유지 단계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푸틴이 운영하는 정치경제는 집권 초기 서구와의 우호적 관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제국, 소련을 거쳐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세계체제에서 반주변부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정 수준의 국내적 산업과 기술 기반을 갖추고, 러시아와 주변국에 통용되는 공산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국의 공간을 개발하기 위해서 서구의 세계체제 핵심부에서 생산되는 높은 기술 수준의 자본재에 접근해야 했고, 그 자본재는 러시아가 천연자원을 판매하여 얻은 경화로 구매할 수 있었다. 푸틴 시기에 러시아의 집권 그룹은 천연자원 수출과 러시아 국내 시장에 대한 정치적 장악력을 바탕으로 부를 쌓아 올렸기 때문에, 천연자원의 주요 시장이자 핵심 자본재의 공급 원천으로서 서구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소련 시기에 부설된 파이프라인이 천연가스를 유럽 대륙에 공급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알스톰과 독일의 지멘스가 러시아에 진출해 인프라를 정비해주었다. 미국의 IT 기업도 러시아 시장에 진출했고, 반대로 보잉은 러시아 티타늄을 구매하며 항공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무역, 투자, 금융 관계를 통해 환류되는 자본은 올리가르히가 주로 런던과 키프로스에 개설한 계좌에 축적되었고, 역시 푸틴은 이러한 국외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더하여 문화적으로도 서구와의 우호 관계는 푸틴을 새로이 지지하는 중산층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는 철의 장막이 허물어지고 러시아가 다시 유럽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했고, 2000년대에 소득이 상승하면서 러시아 중산층들은 여행, 유학, 구직 등 다양한 이유로 실제로 서유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중산층에서 올리가르히를 포괄하는 러시아 사회의 상층부는 서구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나머지 사회와 차별화할 수 있었다. 이런 밀월 관계를 생각하면, 조지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푸틴이 러시아도 이슬람 극단주의와 오랜 투쟁을 벌이고 있다며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필요한 중앙아시아의 공군 기지를 제공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푸틴 체제는 만성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는 2008년 위기로 가격이 폭락하자 이전과 같은 풍요로운 부의 분배를 불가능하게 했다. 푸틴 집권을 통해 탄생한 신세대 중산층들은 집권 초기에는 안정과 풍요를 가능하게 한 푸틴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나, 이제 이들은 점차 정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있었다. 오랜 기간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자유주의 정서에 익숙해진 대도시의 신세대 중산층들은 서구와의 더 큰 연결, 정치적 자유의 신장, 부에 대한 더 개방된 접근 기회를 원했다. 하지만 이것은 올리가르히의 지지를 통해서 집권하고 있는 푸틴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올리가르히들의 사유화된 자본이 계속 보호받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제도들은 권력 엘리트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었다. 높은 수준의 인적 자본을 갖춘 고학력 중산층들은 자신들이 능력에 걸맞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며 체제에 불만을 품었고, 이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 푸틴의 형식적인 자리 교체를 향한 냉소로 이어졌다. 2011년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부정선거 반대 시위는 2008년부터 시작된 대도시 중산층의 지지 이탈이 가장 극명하게 가시화된 결과물이었다.

2011년 이후 서구와 러시아 간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푸틴 정권은 대도시 중산층 대신에 사회경제적 하층을 점하는 대중의 지지에 더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한 지지 블록을 잃고 다른 블록을 얻은 것은 푸틴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정권의 열성적 지지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공산당이 사라진 러시아에서 국가는 인민을 둘러싼 언어와 관념의 장을 확보하지 못했고, 2008년 이후에는 가시적인 물질적 개선도 보여주지 못했다. 올리가르히 자본주의는 대도시의 중산층들에게 능력주의적인 기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동시에 올리가르히를 국가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에 동원해낼 수 없는 러시아 국가와 푸틴 정권의 취약성은 대중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광범위한 국가 개발 및 재분배 프로젝트의 수립과 실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푸틴 정권은 우크라이나, 시리아 등지에서 이어지는 서구와의 갈등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하고, 여전히 안정적 권력 중심으로서 푸틴의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전국민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상징인 대조국전쟁의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러시아의 공간과 한해의 시간 주기를 대조국전쟁으로 가득 채운 것은 국민들의 애국주의를 동원하고자 한 또 다른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림 합병 이후 시작된 서구의 대대적 경제 제재로 인해 시작된 경기 침체, 코로나 팬데믹 당시 정부가 보인 무능은 정권을 향한 지지를 추가로 이탈시켰다. 정권은 외관상으로 강력해 보였지만, 기반은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었다.

푸틴 정권의 정치경제 구조는 러시아와 서구의 지속적인 관계 악화도 일정 부분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설명은 러시아의 제국적 정체성과 소련 해체 시에 겪었던 혼란과 굴욕을 요인으로 제기한다. 나토의 동진과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탈퇴하며 냉전기 상호확증파괴의 균형이 무너진 것도 중요한 배경이다. 이들은 러시아와 서구의 갈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지만, 푸틴 정권이 지속적으로 표출한 분노와 당혹감은 정권을 떠받치는 정치경제 구조의 취약성에 대한 불안감을 고려해야만 설명된다. 생산성 개선이나 국가적 프로젝트로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푸틴과 올리가르히의 연합 정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이 경제적 공간을 온전히 통제해야만 한다. 국영 천연자원 기업과 내수시장에 대한 통제권은 푸틴과 그의 측근들이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보호를 받으며 러시아 영토에서 부를 추출해내는 근간이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화와 그에 수반되는, 중산층 능력주의에 길을 열어주는 경제적 자유화는 부에 대한 권력 엘리트의 독점을 허무는 요구로, 푸틴 정권이 수용할 수 없는 대안이었다. 권력 엘리트의 정치경제적 기반은 그들이 주장하는 통치 정당성과 연결되기 좋았다. 러시아는 소련의 해체와 뒤이은 혼란을 이미 경험했고, 자유화는 그 혼란을 재연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러시아 경제를 서구에 완전히 종속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정권이 공개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정권이 지닌 부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탈소비에트 공간에서 색깔혁명과 자유화 정책을 후원하는 서구와 러시아는 이미 2000년대에도 마찰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관계의 진정한 변화는 2011년에 찾아왔다. 이 해에 일어난 아랍의 봄은 30년 이상 유지된 아랍 권위주의 정권의 연쇄적 붕괴로 이어졌고, 러시아에서도 전국적인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국내의 반대파를 나토가 군사력으로 지원하며 정권 교체를 일으킨 리비아의 사례는 푸틴에게 러시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푸틴은 이후 시리아에서는 나토의 군사 개입을 철저히 막았고, 반대로 자신이 아사드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 행동에 나섰다. 중동에서 갈등을 빚으며 악화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곧이어 우크라이나에서도 등장한 또 다른 정권 교체인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최악으로 치달았다. 2000년대에 서구와 러시아가 누렸던 우호적인 관계의 기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코소보 공습, 오렌지 혁명, 장미 혁명과 남오세티아 전쟁으로 소급되는 서구와 러시아 간 갈등의 역사를 소개하는 연표가 등장했고, 갈등은 초역사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4년부터 2021년까지의 8년도 여전히 사태 전개 방향이 불확실했던 과도기였다. 물론 푸틴 정권은 제재에 대항해 천연자원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중국 및 기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를 심화했고, 문화적 보수주의의 중추 국가로서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며 이후 전쟁에서 러시아가 보여줄 내구성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그럼에도 제재로 인한 경기 침체는 대중의 지지를 이탈시켰고, 푸틴은 시리아 내전 개입보다 더 공격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제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 경제는 에너지 수출과 자본재 수입 때문에 서구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의존은 서구가 경제 제재를 통해 러시아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8년 동안 이어진 돈바스 전쟁도 있었다. 돈바스 분리주의 반군과 우크라이나 정부 간의 민스크 협정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지만, 푸틴은 이 시기에 우크라이나를 향한 특수군사작전을 발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8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나토의 지원을 받고 더 강화되어서, 러시아군은 전장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압도해내기까지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한편 전쟁 발발 직후 이스탄불 협정에 진지하게 임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키예프 방면의 군대를 전면 철수한 사실은 푸틴이 자신이 지지를 제대로 확보해내지 못한 러시아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전쟁 장기화를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정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푸틴이 자신이 관장하는 체제의 취약성과 불안정을 우려하여 전쟁을 꺼려했다면, 애초에 러시아는 왜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사태 전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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