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제프에는 비가 내린다 - (2)
르제프의 용사들을 기리는 거대한 르제프 메모리얼. 스탈린의 방문을 기념하는 스탈린 시찰지.
1818년에 건설된 르제프 오코베츠 성당. 이 도시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당이라고 한다.
볼셰비키 10월 혁명 이후에는 건물이 다행스럽게 파괴되지는 않았으나, 박물관으로 쓰이면서 사실상 성당으로서 기능은 정지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소련 해체 이후에 다시 제 역할을 찾았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본 오코베츠 전경. 비가 잠시 그쳤다.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르제프의 레닌 대로에 무려 '스시-바 후지'라는 곳이 있다길래 한 번 러시아의 근본 없는 동아시아 음식을 먹어보자고 도전.
러시아에서 물론 당연히 일본이나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초밥을 먹을 수 있을 리는 없고, 보통 롤 종류 몇 개랑 피자를 같이 파는 식으로 많이 운영된다.
연어-미소 국수라길래 대체 이건 무슨 근본 없는 맛일까... 하고 시켜 보았는데 이런 게 나왔다. 그 일식집 가면 주는 미소 장국에 인스턴트 우동면 같은 걸 말아준 음식인데... 놀랍게도 맛있다. 사실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긴 하다.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봐서 그렇지..
역시 근본 없는 롤 류도 한 번 먹어봐야지 싶어서 시켜보았다. 인구 6만의 대도시다운 품격 있는 맛이 일품. 와사비 맛은 거의 안 났지만 어쨌든 와사비까지 챙겨줬다..
밖으로 나와서 르제프 전쟁 박물관을 보러 가는데...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길이 개판이었다.
정말 아담하고 자그맣게 있는 르제프 전쟁 박물관.
1942년 남부 전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작전이 바로 천왕성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거대한 규모로 공세를 가한 작전이 바로 화성 작전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코앞인 이곳 르제프는 중부 전선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스탈린 입장에서는 모스크바 방면에서 반격을 해내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에 굉장히 큰 규모로 반격 공세를 개시했었고, 실제로 전선에 한 번 시찰까지 오기도 했었다.
박물관 내부는 별 내용이 거의 없었고, 사실상 이 작은 디오라마가 전시물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시내에서 볼 것은 거의 다 보았고, 시 외곽의 가장 중요한 명승지 두 곳을 볼 차례다.
서쪽에는 스탈린이 직접 방문하였던 전선 시찰지가 있는데, 우선 택시를 타고 이곳까지 가기로 했다.
아마 이 조그만 오두막에서 스탈린이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묵었던 것 같다. 2013년인가 그때 즈음에 개관한 것으로 아는데, 1950년대 탈스탈린화 이후 러시아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진 스탈린 흉상이 새롭게 건립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에 화단에는 대조국전쟁 승리를 상징하는 문양을 그려놓았고...
노인 단체 관광객이 정말 많았다. 단체 관광 버스를 타고 르제프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차량을 타고 전선을 시찰하는 스탈린 동지의 사진
이런 아름다운 우상화 그림도 볼 수 있어서 좋은 곳이었다.
아마 저기서 묵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정말 아담하다..
위에 지도를 참조하면 전선 시찰지에서 훨씬 남쪽으로 가면 르제프의 병사 기념상을 볼 수 있다. 원래라면 버스를 타야겠지만, 러시아의 한적한 교외를 경험해보고자 걷기로 했는데.. 중간에 진창이 나와서 지옥 같은 라스푸티차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한적한 교외인 줄 알았는데 차량 통행량이 또 은근 많았다. 러시아 노래를 흥얼 거리면서 걷고 또 걷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맨날 나오는 말이, 라스푸티차(진창) 때문에 진격을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진짜 이번만큼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슬슬 걷다보니까 나오는 르제프 메모리얼. 10m 언덕 위에 25m 높이로 건립되었다.
작년에 보았던 스탈린그라드의 어머니 조국상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거대한 기념상이다.
입구에 들어가면 설치되어 있는 길인데, 벽에는 익히 그렇듯 이 전투에서 사망한 수많은 소련 병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저 한 줄 한 줄 하나가 사람의 이름이다.
2017년에 건립이 결정된 르제프 기념상은, 2020년에 있을 대조국전쟁 승전 75주년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참혹한 르제프 전투를 보여주기 위하여 군복의 아랫단은 찢겨진 채로 표현이 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이미지만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찢겨진 부분을 학들이 날아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모래시계 노래로 유명한 그 노래 덕택에, 러시아에서 날아가는 백학은 전쟁에서 스러져 간 병사들의 영혼을 의미한다.
엄숙한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고, 하늘은 꾸물꾸물하여 분위기가 참으로 묘했다.
안에는 역시 작은 박물관이 마련되어 있지만, 그렇게 크게 볼 게 많지는 않다.
바깥에 나오면 역시 관광지의 핵심 기념품 상점이 자리하고 있다.
푸틴은 그렇다 치는데 고르바초프는 대체 왜 있는 것일까?
본 것은 좋았는데 문제는 돌아가는 것이었다. 사실 이쯤 되어서는 체력이 방전되었는데, 문제는 르제프 메모리얼에서 시내까지 가는 데 정말 기나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것. 게다가 꽤 외진 곳이라서 택시를 불러도 올지를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걸어가야하나 하고 멘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얀덱스 택시가 잡혀가지고 쉽게 돌아올 수 있었다. 진짜 60년대에 건설된 것 같은 구닥다리 소련 아파트 계단을 올라 먼저 휴식을 청했다.
인근 그루지야 식당에서 훌륭한 음식을 사고, 마트에서 구매한 보드카와 함께 만찬을 즐겼다.
이제 돌아가는 날.... 르제프 버스 터미널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여기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버스가 떠나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없이 적막했다. 터미널 안에 들어가니 웬 아저씨랑 매표소의 아주머니랑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중간에 끼어들어서 물어봤다.
"모스크바로 가려고 하는데요."
"여기서 안 가요."
??? 이게 대체 무슨...
"탱크 주변에 고속 터미널이 있으니 거기서 타셔야 합니다."
도시 남쪽에 T-34 탱크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지도에서 본 바가 있었다. 아, 거기도 버스 정류장이구나. 생각해보면 모스크바에서 르제프로 올 때도 거기서 하차했던 것 같았다.
가는 길에 보게 된 웅장한 낙서
"바그너 - 러시아".
이것도 르제프 탈환을 기념하면서 설치된 기관차라고 한다.
옆에 설치된 자그마한 예배당이 운치 있다.
"탱크 주변"에서 말했던 그 탱크. 아.. 이 도시에서는 주요 지형 지물이 T-34 탱크구나...
사실 이건 버스도 아니고 마르쉬룻카라고 불리는 승합차인데, 역시 비좁기 그지 없다. 이제 4시간 내지 5시간을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갈 시간!
빨리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다음은 어디로 여행을 떠날지 고민을 하며 꾸벅꾸벅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