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살만-시진핑 회담: '1979년 체제'에 일어난 격변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시작된 1979년 체제는 아랍 봉기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연말의 국제 뉴스를 가장 뜨겁게 달군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와 중국 시진핑 주석의 전격 회담이었다. 중동에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미국의 맹우이자, 페트로달러로 대변되는 현대 세계 체제의 기틀을 담당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가장 강력한 전략적 경쟁자와 만나 전방위적 협력을 도모하겠다는 뉴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 급속하게 흔들리고 있는 미국의 일극 체제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이 회담은 어떤 배경에서 개최된 것이고 앞으로 어떤 함의를 갖게 될 것인가? 간단하게 정리해보았다.
중동의 1979년 체제
오늘날 중동을 규정하고 있는 모습은 큰 틀에서는 1979년에 형성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중동을 규정하는 체제는 세계 여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미소 양강의 냉전 체제였다. 중동에서 미국은 나토 회원국인 터키와 우방인 이스라엘, 이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보했고, 소련은 아랍 사회주의 공화국들인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집트에서는 1976년에 나세르의 후계자인 안와르 사다트가 소련 고문단을 내쫓고 미국의 우방국으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기존 질서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 경합하는 냉전의 기본적 대립 구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1979년은 그런 점에서 탈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라고 할만 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전통적 대립구도와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대립구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 혁명이었다. 바자르 상인들과 도시 빈민을 규합한 성직자들은 이슬람주의라는 이념을 내걸면서 친미적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던, 그리고 실패했던 팔레비 왕정을 전복했다. 이 사건은 냉전 구도를 뛰어넘어서, 기존 중동의 정치적 권위 전체에 도전장을 내민 사건이었다. 이란은 세계 각지의 무슬림들에게 혁명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보수적 왕정 국가도, 터키처럼 미국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국가도, 이라크와 시리아처럼 소련식 근대화 노선을 걷는 국가도 모두 알라와 무함마드의 메시지에 따라 샤리아에 입각한 정부를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보수적 왕정 체제 하에서 오일머니 특수를 국민에게 적당히 분배하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 혁명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은 국가였다. 사우디에서도 이란과 마찬가지로 계층 격차가 생기고, 근대화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반발 심리가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었고, 국가의 동부에는 이란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시아파 인구가 상당히 살고 있었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이데올로기인 보수적 이슬람 교리인 와하브주의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청년 인구가 이슬람주의를 채택하도록 돕는 토양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 결과 1979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극단적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가 이슬람 최고 성지 메카를 점거하고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편, 이슬람주의의 도전은 미국과 소련 양대 초강대국에도 심각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소련 남하를 저지하는 든든한 거점 중 하나였던 이란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지정학적 타격을 입었으며, 444일 동안 미국 대사관을 놓고 벌어진 인질극은 미국의 위신에 먹칠을 하기에 충분했다. 소련은 이란의 격변이 인접한 중앙아시아에서 무슬림들의 반정부 의식을 드높일 것을 우려했고, 특히 최근에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 퍼져가는 불안정도 해결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이란을 중심으로 동서 양편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주도하여, 역시나 이란에 위기감을 느끼는 이라크를 통해 무려 8년 간의 대리전을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이다. 아랍 사회주의 정당인 바스당의 후세인과 미국, 사우디가 한 편을 이룬 것은 종래의 냉전 구도가 변하고 있음을 알린 상징이었다. 한편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대대적으로 개입하여, 고르바초프가 1989년에 철군하기까지 10년에 달하는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은 이미 허약해진 소련 체제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 소련 붕괴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자국의 이슬람주의 청년들을 소련을 향한 성전에 파견하였고, 이를 통해서 자국의 잠재적 불만 세력을 수출함과 동시에 ‘두 성지의 수호자’라는 칭호에 걸맞는 이슬람 공동체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여 위신을 챙길 수 있었다.
이런 사건들이 맞물려 1979년 체제의 윤곽이 자리 잡히게 된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란이 주도하는 이슬람주의와 시아파 네트워크의 공격적인 부상을 최대한 억제하고, 이 지역의 안보를 지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망을 유지한다. 반면 이란은 반대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란에게 있어서 이라크의 전면적 침공은 1953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모사데그 총리가 석유 산업 국유화를 선언하자 미국과 영국의 정보부가 개입하여 쿠데타를 종용해 1953년에 모사데그가 실각한 사건이 있었다. 이는 이란의 자주적 민족주의를 서방 에너지 자본을 앞세운 제국주의 세력이 전혀 존중할 생각이 없다는 상징으로서 계속해서 회자될 것이었다. 이슬람 혁명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이나, 이라크와 무려 8년 간 치른 파괴적 전쟁은 이란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일종의 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를 심어줬다. 따라서 핵심은 해외에서 최대한 많은 협력자를 찾아내고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이 되어야 했다. 이란은 레바논의 시아파 정당이자 무장조직인 헤즈볼라,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를 견제하기 위하여 물밑에서 이란을 도와준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를 동맹으로 찾았다. 이러한 이란의 움직임은 북쪽에서 시리아가 제기하는 압박에 편집증적 공포를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을 크게 자극하는 것이었고, 특히나 여기에 이란 혁명 정권의 반이스라엘 선전이 결합하자 이스라엘은 존재론적 공포를 품게 된다.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과 이란을 중심으로 하는 대립구도가 드러나는 사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1979년은 미소 냉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해였다.
2. 1979년 체제의 균열
벌써 43년이나 지난 1979년 체제는, 여타 모든 체제가 그렇듯이 다양한 위기와 도전을 맞닥뜨렸다. 이 체제는 대체로 견고하게 유지되었지만, 체제를 뒷받침하는 조건들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2022년은 1979년 체제가 영원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천명한 해였다.
최초의 위기는 이라크의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한 뒤에 다시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쿠웨이트를 침공한 걸프 전쟁에서 발생했다. 8년 간의 전쟁 끝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경제와 사회만 피폐해진 후세인은 미국과 사우디에 놀아났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쿠웨이트의 유전을 통해서 보상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넘어 자국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 물론 사태는 미국이 사우디와 걸프 전역에 전개한 막대한 첨단 무기를 이라크군에 쏟아부은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금세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슬람 세계 전체의 맹주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이교도 미국’에 손을 벌린 그림을 연출하면서, 이슬람 세계, 특히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서 사우디의 위신에 치명타를 입혔다. 소련을 굴복시켰다며 의기양양한 아프가니스탄의 지하드주의자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했던 사우디 왕실이 이제는 선지자의 땅에 미군을 끌어들인 수치스러운 집단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그 지도자인 오사마 빈라덴은 1990년대를 거치며 세계 각지의 미군 기지에 테러 행위를 벌였고, 2001년에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초유의 항공기 테러를 일으키면서 전세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물론 사우디 정부는 빈라덴과 자국의 연관성을 곧바로 부정했고, 1979년 체제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지만, 사우디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하여 이슬람 세계 전체에서 와하브주의를 전파하며 이슬람 극단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것, 더하여 여성 운전 금지로 대변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극히 보수적인 사회문화 정책들은 서방 세계 안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미국은 79년 체제를 끝내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각각 침공한 것이었다. 후세인의 이라크는 걸프 전쟁의 대패 이후에 확고한 반미 진영에 들어가면서, 과거의 숙적이었던 이란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 정부가 들어서서 악명 높은 이슬람주의 정책을 수행했고, 결정적으로 빈라덴을 숨겨주었다. 미국은 이 두 국가를 먼저 처리하면서 이란을 양편에서 포위하기를 노렸던 것 같다. 이란을 확실히 포위하여 종국적으로 정권을 다시 교체한다면 79년 체제는 종료되고 ‘역사의 종언’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역설적인 것은 이 세 국가의 체제는 반미라는 것 이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란은 시아파 이슬람주의였고, 내부적으로 억압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기는 했어도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같은 조직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호메이니 사후에 이란은 혁명 수출을 멈추었고, 국가적 발전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시작한 터였다. 이라크의 바스당은 애초에 이슬람주의와 상극인 세속주의 성향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세 정권을 하나로 묶고 개입한 부시 행정부의 중동 정책은 시작부터 재난을 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이라크에서 후세인이 제거된 이후 수립된 민주 정부는, 후세인 치하에서 억압받았던 다수 시아파가 친이란으로 움직이면서 미국이 바랐던 바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2011년에 발생한 연쇄적인 아랍 봉기는 1979년 체제에 본격적인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미국은 처음에 연쇄적인 민주화 운동이 친서방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역내 국가들의 셈법은 복잡했다. 그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부는 계속 유지가 되기를 원했고, 자신들과 적대하는 정부는 전복되기를 원했다. 시리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사드 정권에 맞서는 순니파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자국의 ‘불온 세력’들이 인접국의 혁명에 자극받아 봉기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한 눈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다트 이후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보조를 맞춰온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의 붕괴는 가장 치명적인 일이었다. 자국의 인접한 시아파 인구를 동요시킬 바레인과 예멘 시아파들의 봉기도 마찬가지였다.
2014년에 이르렀을 때 아랍 봉기는 봄날의 햇살이 아니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길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집트에서는 군부 정권 이후에 등장한 이슬람주의 성향의 무르시 정부가 엄청난 논란을 만들면서 정국을 혼란으로 끌고 가고 있었고, 마침내 사우디와 함께 하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엘시시의 군부 정권으로 돌아갔다. 리비아에서는 카다피 사후에 총체적인 혼란으로 빠져들어 부족과 지역 간의 항구적인 무정부 상태가 펼쳐졌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그 해 있었던 이라크 모술 함락이었다. 내전 속에서 무정부 상태로 빠진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 지대를 오가며 성장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 IS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사드 정권을 압박하여 지정학적 이득을 취하고자 순니파 반군을 지원했던 터키와 사우디는 자신들의 통제와 예상을 벗어난 괴물을 만드는 데 일조한 셈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아랍 봉기의 혼란 속에서 이란이 약진하기 시작했다. 가셈 솔레이마니 장군과 그가 이끄는 쿠드스 부대를 비롯하여 이란군은 IS 토벌을 명분으로 시리아에서 작전을 벌였고, 예멘 내전에도 개입하여 시아파 후티 반군을 지원했다. 아랍 권위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공백을, 경제 제재 속에서도 꿋꿋이 버틴 이란이 채우고 있는 모양새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보기에 이는 이란을 중심으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을 거쳐 예멘과 바레인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초승달’의 형성이나 다름없었다. 이란이 느꼈던 피포위 의식을 이제는 반대로 사우디가 느끼게 된 것이었다. 사우디는 마찬가지로 중동 각지에서 이란에 맞서는 무장 조직이나 정부를 지원하면서, 중동에서는 사우디와 이란의 ‘중동 냉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1979년 체제 자체의 해체를 다른 방식으로 시도했다. 부시와 같은 무력 개입이 아니라 외교 협상을 통해서 말이다. 오바마가 보기에 장기적으로 미국이 집중해야 하는 공간은 이제 아시아 태평양이었다. 부시가 중동에서 허우적대는 동안에 중국은 안전하게 자신의 힘을 키워서 이제 실질적인 전략적 경쟁자의 위치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 미국의 안보 자산을 재배치하기 위해서라면 먼저 중동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침 일어난 중동에 거대한 세력 공백과 혼란은 오바마의 시간표에 분명 커다란 방해가 되었을 것이지만, 오바마는 오히려 이 기회를 활용하여 1979년 체제 자체를 수정할 수 있으리라 보았던 것 같다. IS 토벌은 이란이 이전의 탈레반과 알카에다 같은 정말 말이 안 통하는 극단주의자와는 다른, 대화할 수 있는 상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먼저 핵무기를 내려놓게 한 다음에, 이란에 대대적인 투자와 경제 협력을 통해서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늘리면, 이란에 잠재되어 있는 활발한 시민 사회와 중산층들이 힘을 얻어 이란 자체의 체제 전환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란은 더는 불량 국가가 아니라 지역 강대국으로서 역내 안정에 기여하는 우량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었다. 중동을 중동 사람들이 알아서 잘 관리하게 만들어주면, 이제 미국은 아시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오바마의 계획은 사우디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다름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벨러야테 파키흐’라는 이란의 성직자 체제가 먼저 무너지지 않는 한, 이란과 어떠한 대화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핵협상은 이란의 기만책에 불과하고, 다시금 힘을 키운 이란은 다시금 세력을 투사하여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위협할 것이라는 불만을 미국에 전했다. 공화당은 이란 핵협상이 사실상 미국이 이란에 투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그 모든 비난을 뚫고 임기 막바지에 이란의 중도파 대통령 로하니와 협상을 체결하면서 자신의 대전략을 마무리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트럼프의 당선이 모든 것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3. 1979년 체제의 복원?
트럼프는 오바마가 맺었던 핵협상을 모조리 무위로 돌린 다음에, 이란 측이 절대 받을 수 없는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핵 능력뿐 아니라 미사일 능력도 제거해야 했고, 역외에 이란이 확보한 군사적 거점들과 협력 관계를 모두 청산해야 했다. 물론 이란이 이정도 조건도 받았더라면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핵협상을 용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란이 이 조건을 받는 순간 정권은 유지될 수가 없었다. 트럼프의 제안은 협상을 중단하고 옛날로 돌아가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환호했고, 이란의 중도-개혁파는 보수파의 맹공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에 너희들은 미국에 속은 것이라는 공격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변명은 없었다.
1979년의 단층선이 활성화되고, 이란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격렬해지고 있었다. 2019년에 예멘의 후티 반군은 드론을 활용한 전술로 첨단 미국 무기로 무장한 사우디아라비아를 농락하고 정유소에 대대적인 테러를 가했다. 2020년 신년에 미국은 바그다드에서 쿠드스군 사령관이자 이란 최고의 전쟁 영웅 솔레이마니를 암살하면서 마침내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 중국의 도전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동의 긴장을 언제까지고 감당할 수는 없었다. 오바마처럼 1979년 체제 자체를 해체하는 방향은 어차피 선택지가 아니었으니,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맺어지게 된 것이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레이트, 바레인 간에 맺어진 아브라함 협정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로 인해서 아랍 국가와는 철천지 원수인 이스라엘이 이들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복원하면서 친미 성향 중동 국가들의 연계를 확보하여 이란에 공동 대응하는 계획의 시작점을 마련하게 됐다.
1979년 체제의 강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는 이란으로 하여금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게끔 만들었다. 이란 또한 자국 안에서 지속되는 경제난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반발이 겹치면서 정권의 안정성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2009년에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벌어진 녹색운동이 시작이었고, 2017년과 2019년에도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당초 로하니 정부는 핵협상을 통해서 세계와 다시 연결되면 경제난을 해소할 수 있고, 사회적 불만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세계와의 연결은 실패했고, 잔뜩 기대감이 높아 있던 이란 국민들의 실망감은 반미 정서로도 이어졌지만 반정부 정서로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이란 입장에서 잡아야 하는 동아줄은 결국에는 중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7월, 베이징과 테헤란은 전략적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고 25년 기한의 광범위한 협력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중국은 이제 이란으로부터 원유를 비롯한 에너지를 공급받고, 대신에 이란이 필요로 하는 인프라와 기술 면에서 투자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협정의 골자였다. 아예2021년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에 가입했다. 그렇게 중동의 1979년 체제는 강화되는 것을 넘어서 아예 무대 전체가 확장되고 있었다. 걸프만에 놓인 단층선은 미국의 인도 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의 단층선이 되어가고 있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4. 1979년 체제의 해체?
중동의 1979년 체제는 이란에서 일어난 정권 교체로 인해서 발생했다. 반대로 1979년 체제는 반대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정권 교체로 인하여 크게 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주인공인 단연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다.
MBS는 우선 1979년 체제의 전제가 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통 체제를 혁파하겠다며 등장했다. 보수적인 이슬람 울라마와 수천이 되는 왕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사회를 가능한 한 전통적 방식대로 고정하고자 하는 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오랜 진로였다. 여기에 위협이 되는 사회주의자, 아랍 민족주의자, 시아파, 이슬람주의자, 여성 운동가 등은 철저한 탄압이 대상이 되었다. 문제는 아랍 봉기로 상징되는 변화의 물결이 사우디 왕정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형제 승계로 대변되는 사우디 왕가는 이제 점차 노쇠한 국왕들로 인하여 정치적 불안정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화석연료 시대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 분명해지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장기적 생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2014년에 발생한 미국 셰일 업체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저유가 치킨 게임은 사우디의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공급이 늘어나거나, 혹은 대체에너지의 확보로 화석연료의 쓰임새가 대폭 줄어들어서 유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할 경우, 사우디의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정이 순식간에 폭발하여 여타 아랍 국가와 같은 봉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30대의 나이로 사우디의 지도자가 된 MBS는 왕가의 장기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현 체제를 어떻게든 바꾸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 과정에서 가혹한 정적 탄압이 있었는데, 언론인 자말 카슈크지 살해는 그 상징이 되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1979년 체제의 강화를 염두에 두었던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에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민주당이 이란 핵협상을 자신들의 외교적 치적이자 대계획의 이정표로 생각하는 이상, 갑작스럽게 이 모든 것을 엎어버린 트럼프와 그를 배후에서 지원한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을 곱게 볼 수는 없었다. 솔레이마니 암살과 이란-중국 전략 협정의 체결로 핵협상이 단기간에 부활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바이든은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를 지원하는 것을 중단함과 동시에 카슈크지 사건을 해명하라면서 MBS를 압박했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다시 급속도로 냉각되었지만, 사우디 입장에서는 이란과의 긴장이 여전한 이상 미국에 기본적으로 아쉬운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둘의 관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러시아에 전개된 막대한 경제 제재는 에너지 공급에 큰 불안정을 일으켜서 유가를 크게 올렸다. 미국은 에너지 공급망의 최대 파트너인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 석유 증산을 설득하고자 했다. 페트로달러 체제의 핵심 국가로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체로 미국의 요구에 따라주었는데, 1985년에 대규모 증산을 통해 유가를 하강시켜 소련을 압박한 것은 가자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에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다. 어차피 고유가로 돈을 쓸어 담게 되었고, 자신에 협조적이지 않은 미국에 좋은 일을 구태여 해줄 이유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든이 카슈크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자, MBS는 격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푸틴이 일으킨 에너지 전쟁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바이든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사실 두 국가는 1979년 체제의 대립구도에서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이란이 중국과 가까워지면서, 동시에 인접한 러시아와도 크게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와 사우디는 또 다른 체제인 ‘1973년 체제’에서 동맹이 될 수 있었다. 1973년에 일어난 오일쇼크와 국영 에너지 회사들의 약진은 힘의 무게추를 자원 소비국에서 자원 생산국으로 옮기는 결정적인 변곡점이었다. 물론 사우디는 자원 생산국의 지도국임과 동시에, 에너지 면에서도 미국과 협력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은 막대한 자원 수입국임과 동시에 달러를 통해서 세계적 신용을 담당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미국의 에너지 정책이 바뀌면서 사우디가 미국과의 협력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트럼프를 비롯한 공화당은 사우디에 무척 우호적이지만, 셰일 에너지의 적극적인 개발을 주장했다. 자국에서 화석연료 에너지를 자급하게 되면서, 미국에는 고립주의를 옹호하는 세력이 다시금 힘을 얻게 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미국이 사우디 안보에 시큰둥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반면 민주당은 기후와 환경 문제에 집중하면서 장기적으로 탈탄소 경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국정 과제를 내걸었다. 이런 경우 미국의 에너지 정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존립 기반 자체를 흔드는 문제가 된다. MBS는 2017년에 왕세자가 되고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을 만났다. 각각 세계 최대의 자원 공급국으로서 두 국가는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원 소비국들의 공동 대응에 맞설 때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수 있는 협력자이기도 했다. OPEC+의 협의에 따라 MBS는 바이든의 증산 요구를 일각에 거절하고 자원 공급국 간의 공동 대응 필요성을 주장했다.
미국의 최대 경쟁자인 중국과 미국의 중동 최대 우방인 사우디의 ‘이상한’ 회담은 이런 맥락에서 개최된 것이었다. MBS는 최첨단 초거대 도시 네옴 시티 건설 계획을 필두로 하는 국가 전면 개조 프로젝트를 내세웠고, 여기에서 중국과의 전방위적 협력을 확약받았다. 이 과정에서 ‘보수적 사우디 왕가와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하는 이란의 대립’을 중심으로 짜인 1979년 체제는 다방면으로 변화를 겪고 있었다. MBS는 처음에는 트럼프와 밀월 관계를 통해서 1979년 체제를 강화하면서 국가적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으나, 바이든으로 정권 교체가 되자 기존 방식이 지속될 수 없음을 느낀 듯하다. 현재 MBS는 두 가지 측면에서 미국에 큰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다. 첫째는 정권이 교체되면서 외교 정책의 연속성이 사라지는데, 4년마다 모든 게 뒤집히는 불확실성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불만이다. 둘째는 에너지 정책에 있어서 더는 미국과 협력할 공산이 좁아지는 가운데 미국이 제시할 당근이 과연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다. 오히려 사우디는 러시아와 협력을 통해서 에너지 공급국의 상대적 입지를 드높일 수 있고, 중국과의 거래를 통해서 네옴을 비롯한 각종 인프라 프로젝트에서 빠른 진전을 기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카슈크지를 필두로 계속해서 MBS 때리기에 나서니, ‘아쉬운 쪽이 누구인지 한 번 보자’는 식으로 미국에 일관되게 비협조적인 행보를 보이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란의 반응이다. 이란은 믿었던 중국이 자신의 최대 숙적 사우디아라비아와 광범위한 협력을 발표하니 뒷통수가 얼얼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란 입장에서는 퇴로가 없다. 솔레이마니 암살 이후에 이란에서 대서방 유화파는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중국은 이제 이란산 에너지의 막대한 수요처이자 경제 협력국으로서 이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도 급진전 되는 중이다. 특히 러시아가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얻어맞으면서 동쪽과 남쪽에서 경제적 기회를 찾아 움직이고 있는지라, 이란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미국의 제재를 함께 헤쳐나갈 동지가 된 셈이다. 그런데 이란이 러시아에 군용 드론을 대거 공급하게 되면서 전통적으로 서방에서 이란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유럽과의 관계도 돌이킬 수 없이 틀어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을 통해 벌어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와 그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이란 정권으로 하여금 서방 자유 진영과의 어떠한 협력이나 대화도 불가능하게 만들게 되었다. 따라서 이란은 중국과 사우디의 밀착에 항의를 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를 막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 체제를 떠날 수도 있는 입장도 아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계산기를 어떻게 두드리고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최상의 그림은, 베이징-모스크바-테헤란의 삼각 축을 최대한 공고히하여 유라시아에서 미국 세력을 쫓아내는 것이다. 지정학적 위치나 국력, 자원, 현대사와 외교 관계 등 여러모로 보았을 때 베이징과 모스크바도 테헤란과의 협력은 필수불가결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도 중동에서 고립된 이란보다는 중동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이란과의 협력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를 가로막는 것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미국과 함께 만들어놓은 철통같은 대 이란 견제 네트워크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는 중동에서 1979년 체제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 최상의 수가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사이를 이간질시켜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최소한 친미 동맹국이 아니라 서방과 유라시아 사이에서 ‘간을 보는’ 국가로 전환시키고, 종국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를 주선하여 이란에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면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된다. 올해 들어 여러 차례 있었던 사우디와 이란의 고위급 물밑 회담들은 양국의 화해를 통한 1979년 체제의 해체가 아예 불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1979년 체제의 시작을 알린 이란 이슬람 혁명도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혁명(unthinkable revolution)’이었다. 양국이 정말 화해를 하게 된다면, 1979년 이래 시작된 하나의 시대가 마무리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물론 미국이 이를 좌시할 리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보았지만, 어쨌든 2010년대를 거치면서 베이징-모스크바-테헤란 축이 결속하게 되었다. 중국은 핵심적인 경쟁자고, 러시아는 전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란은 미국의 오락가락하는 외교 정책을 거치면서 비슷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에 하나의 동맹국과 우방국이라도 아쉽게 되었는데, 바이든이 집권하자마자 MBS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큰 실책이었다고 생각된다. 정말로 사우디와 이란이 화해라도 해서 1979년 체제가 무너진다면 미국은 중동에서 영향력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주요한 명분을 상실하고 중국과 러시아에 중동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사우디아라비아가 당장 미국을 버리거나 이란과 화해할 것이라 보이지는 않는다. 사우디와 미국의 밀월은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고, 사우디와 이란의 원한 관계는 정말 깊다. 하지만 그런 모든 제반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최근에 일어나는 변화는 심상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미국이 해야 할 일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결국에 이란과 마찬가지로 사우디 입장에서도 미국에 갖는 최대의 불만은 ‘정권에 따라 외교정책이 바뀌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오바마는 핵협상을 통해서 1979년 체제를 없애려 했다가, 트럼프가 다시 1979년 체제를 복원, 강화하자고 했고, 바이든은 감을 잡을 수 없는 외교 행보로 1979년 체제를 다른 방향으로 뒤엎고 있다. 2024년에 사우디에 적대적인 민주당 인사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면 사우디는 정말로 미국과의 이별을 준비할지도 모른다. 미국과 이별한 상황에서 그들이 안보를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다른 안보 협력국을 찾는 것, 그리고 이란과의 화해를 통해 안보에 대한 압박 자체를 줄이는 것이 된다. 현재로서는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MBS도 이정도까지 미국과의 관계가 파탄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 같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미국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사우디아라비아와 확실하게 안정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미국 정가에서 그런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가능할까? 여하간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동의 재편은 이미 시작되었다.
1979년 체제로의 단순한 회귀는 이제 불가능하다. 사우디는 더는 과거처럼 보수적 사회를 유지하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게 되었으며, 반정부 에너지에 직면한 이란도 새로운 출로가 필요하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더는 철의 동맹이 아니고, 중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당근을 들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 아랍 봉기가 대대적인 재난으로 끝나면서, 민주주의나 이슬람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념과 발전 모델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이 되었고, 이슬람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내의 정치적 대립구도도 흐릿해지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포스트 1979년 체제’를 서방 세력에 이롭게 짜느냐, 유라시아 세력에 이롭게 짜느냐의 게임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