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도상륙(昭南島上陸) - 1
싱가포르를 둘러보다
이번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다녀온 여행지는, 인천에서 7시간을 남쪽으로 내려가면 닿을 수 있는 적도에 걸친 섬 싱가포르다.
지난 두어 달 싱가포르에 관심이 생겨 책을 읽고 공부를 조금이나마 해서, 싱가포르 탐방을 해보기로 결정. 이번 여행기의 제목인 소남도(昭南島)는 일본 제국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붙인 이름인데, '쇼와 시대 남쪽에 얻은 섬'이라는 뜻이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기억하는 한국의 옛 노인들 중에서는 싱가포르 대신 계속해서 그들의 젊은 날에 각인된 이름인 '소남도'라고 부르는 분도 있었다. 싱가포르의 여러 박물관에도 이 시기를 Syonan Period 등의 이름으로 칭하며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싱가포르는 한국인에게도 꽤 알려진 국가기 때문에 꽤 자세히 설명할 것은 없겠으나, 일단은 간단한 개황은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싱가포르와 인근의 말레이 반도는 근대 이전부터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에 속한 항구, 상업 도시들이 많았다. 지중해 세계, 중화 세계, 인도 세계라는 세 문명권이 발전하면서, 이 지역에 축적되는 부는 서로를 끌어당겼는데, 그 결과 서양과 동양 사이의 세계에서는 초원과 사막, 바다를 가리지 않고 여러 문명이 교차하는 무역 도시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상 실크로드 네트워크는 아래 지도에서 보이듯이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동쪽으로는 천주(취안저우)와 같은 중국 해안의 도시까지 뻗어 있었고, 싱가포르가 속한 말레이 지역은 동중국해와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진입하는 주요 길목으로 그 이전부터 중요했다.
인도양 바닷길은 몽골 제국이 문명 간 교류를 대폭 촉진하면서 더욱 확대 되었는데, 이 시기 오늘날의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두 집단도 대거 유입되게 된다. 하나는 송 제국 시기부터 무역을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중국계며, 다른 하나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에서 유입된 무슬림 상인들이었다. 중국계는 이 지역에서 현지인과 통혼하며 중국과 동남아시아, 인도가 섞인 독창적인 집단인 페라나칸을 형성했고, 오늘날 싱가포르 정체성의 기초를 닦았다.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의 지도자들은 서쪽의 더 넓은 무역 네트워크와 접속을 용이하게 해주는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이후에 이 지역은 가장 거대한 인구를 자랑하는 무슬림 지역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이 지역은 점차 상업적 이익을 찾아 군사력을 대동하고 온 유럽인의 영향력에 종속되어 갔다. 최초에는 향료를 찾아 포르투갈이 왔으며, 그 다음에는 네덜란드가 왔다. 물론 이 지역을 최종적으로 손에 넣게 되는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네덜란드와 협정을 통해 말레이시아를 영국이,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가 차지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1819년, 동인도회사의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가 말레이 반도 남단의 섬 싱가포르를 조호르 술탄국으로부터 양도 받고, 대영제국의 무역 거점으로 개발하게 되니 오늘날 싱가포르 역사의 시작이다.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주요 항구 도시인 싱가포르, 말라카, 페낭을 해협정착지(Straits Settlements)로서 통치했다. 19세기 산업혁명은 철도와 증기선을 만들었고, 해안 지대에만 국한되던 유럽 제국의 식민 통치는 광대한 아시아의 내륙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유럽 제국의 중심이 요구하는 각종 자원이 개발되었고, 각 식민지들은 유럽 제국이 지정한 상품을 생산하며 경제적 입지를 특화해 갔다. 유럽과 식민지의 무역, 식민지 간의 무역이 폭증하면서 싱가포르와 같은 핵심 항구 도시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져 갔다. 인도에서는 면화가 쏟아져 나와 영국의 방직기에 투입되었고, 그들을 위한 쌀은 미얀마의 거대한 이라와디 강에서 생산되었다. 싱가포르 인근의 말레이시아는 근대 경제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은 고무와 주석의 주요 생산지로서 개발되었다.
그리고 싱가포르는 더욱 동쪽의 홍콩과, 이제 막 개통되어 지중해와 인도양을 쾌속으로 이어준 수에즈를 매개하는 주요 거점으로 거듭났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거대한 바다를 오가는 증기선이 먹어치우는 석탄을 공급하는 최적의 장소가 되었고, 영국은 근육의 힘으로 석탄을 끊임없이 공급해주는 노동력을 중국에서 수입해 왔다. 물론 제국의 최고 식민지인 인도에서도 많은 인력이 공급되어 이 섬에 인도 색채를 더했다. 싱가포르는 16세기부터 진출한 유서깊은 아시아의 상인 가문들이 운영하는 점포, 19세기에 들어온 하얀 피부의 식민자들의 상업-금융 기관, 그리고 그들을 위해 값싸고 고된 노동을 제공하는 쿨리들의 도시로 번창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말레이 반도에서 대영제국의 통치는 20세기에 세계사의 격랑을 맞이하면서 흔들리게 되고, 그 때부터 '해협 정착지'가 아닌 '싱가포르'의 역사가 태동하게 된다.
우선 날이 더워서 찾은 싱가포르의 한 스타벅스. 줄이 엄청 길게 늘어서 있길래 이게 주문 줄인가? 하고 보았지만 주문 줄은 아니었다. 대체 무엇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블랙핑크 한정판 음료 이벤트 줄이었다. 시작부터 K-POP 제국이 남양 끝까지 닿아 있는 것에 흡족.
거리는 깔끔하고, 새하얀 유럽식(혹은 페라나칸식) 건축물들이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날은 쪄죽을 정도로 더웠지만 한국도 이정도로 덥다는 소식을 듣고 위안을 삼기로 했다.
우선 처음에 볼 곳은 위의 지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Civilian War Memorial"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점령 기간에 죽었던 싱가포르 민간인을 추모하는 기념비로, 일본군 점령 25주년인 1967년에 리콴유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기둥이 네 개인데, 일본군에 의하여 고통 받은 싱가포르의 네 민족(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영국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싱가포르는 인구 70% 이상이 중국계인 곳이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인(Chinese)' 대신 '싱가포르인(Singaporian)'의 정체성을 훨씬 강조하며 다민족 국가의 취약성을 극복하려고 오랜 세월 노력해왔다. 그래서 이런 국가 기념물에는 4개 언어가 항상 병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드디어 발견했다. 싱가포르의 악명 높은 벌금 정책. 무슨 담배 하나에 2백만원이나 벌금을 물리나.. 그러나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니 야외에서 편히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유서 깊은 빅토리아 극장을 넘어서는 대형 공연을 수용하기 위하여 2002년에 완공된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그 앞에서 휘날리는 거대한 싱가포르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인근에는 싱가포르 전몰 장병 기념비(Cenotaph)도 있다. 이 기념비는 원래 1922년에 건립된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영국군 장병을 기리기 위하여 대영제국에서 건립한 것이다. 그래서 앞 면에는 1914-1918이 써있다. 뒷면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새롭게 작성되었는데, 이번에는 1942-1945년, 즉 제2차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기린다. "그들은 우리가 살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죽었다."라는 문구가 써 있고, 역시 4개 언어로 기념되어 있다.
사실 싱가포르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기념물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실제 기념물은 아니고 옛 기념물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 기념비 터인데, 일전에 도쿄 여행기에서 올렸던 인도국민군의 지도자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건립했다.
1930년대 이후 일본 제국은 국가 이데올로기를 자유주의에서 아시아주의로 크게 전환했고, 그 과정에서 인도 독립운동가들과 일본 아시아주의 지식인들의 유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본래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동맹까지 맺었던 일본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인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심정적 지지를 보냈으며, 이에 영국이 항의하자 반영 정서가 확산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일본 제국이 동남아시아로 팽창을 하면서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군의 협조 하에 인도를 무장 투쟁으로 해방할 비전을 발견하게 되었고, 거기서 지도자로 부상한 인물이 바로 라시 베하리 보스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였다(둘은 혈연 관계는 아님). 남방작전을 통해 말라야에서 영국군을 대패시킨 일본군은 이 지역에서 상당한 수의 인도계 영국군 포로를 얻었는데, 일본과 찬드라 보스는 이들을 조직하여 영국에 저항하는 군대로 활용하고자 했고, 그 존재 자체로서 아시아주의의 대의를 입증하는 것으로 삼으려고 했다.
찬드라 보스는 인도 국민군이 세워진 싱가포르에서, 일본 제국의 패망이 눈 앞에 다가온 1945년 7월에 언젠가는 인도가 독립할 수 있을 것을 꿈 꾸며 기념석을 세웠다. 훗날 영국군이 싱가포르를 다시 차지했을 때 기념비는 당연히 철거되었지만, 싱가포르의 인도인들 사이에서 찬드라 보스와 인도 국민군은 계속해서 기억되었고 이러한 기념석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유서 깊은 빅토리아 콘서트 홀. 1860년대에 완공되었고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은 1909년이다. 앞에는 이 도시의 건립자인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의 동상이 서있다. 상징성이 큰 곳이었기에, 위키백과에 따르면 일본군 전범 재판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인민행동당 창당 대회가 열린 곳도 이곳이었다고 한다.
"정부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를 실감할 수 있었던 CCTV....
구 싱가포르 대법원과 시청 건물로, 지금은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인 곳이다. 일본군이 영국군에게 이곳에서 항복했으며, 리콴유의 사무실도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쨍쨍한 하늘과 마천루 앞에 보이는 오벨리스크.
정말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판이 아니었나 싶었다. 중국인, 말레이인, 대영제국의 정체성을 어떠한 감정도 없이 담담하게 긍정하고, '모든 규제로부터 상업을 자유화한 지혜'를 상찬하고 있다.
싱가포르 강 인근의 재미난 기념물. 영국 식민자, 주판을 들고 계산을 하는 중국인, 그리고 그 옆에서 고력(苦力)에 종사하는 중국인과 인도인.... 19세기 싱가포르 항구를 하나의 장면으로 재현한 것과도 같았는데, 영국 식민 지배에 대해서 어떠한 유감도 표하지 않는 역시나 담담한 표현이 일품이다.
그 유명한 싱가포르의 상징, 인어(mermaid)와 사자(lion)의 결합인 머라이언(Merlion) 상이다. 사실 싱가포르의 상징으로서 수없이 봐온 것인데, 막상 가보니 또 약간 아기자기한 게 그렇게까지 엄청난 포스를 주는 기념물은 아니었다. 그래도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롭긴 했다.
잠시 허기를 달래려고 들어간 모스버거 매장에서 여지없이 마주한 대조선의 문화..
그 뒤에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을 구경하러 이동했다. 걷는데 이쯤되니 슬슬 지쳐가는데.. 지칠 때쯤 되면 더위를 피할 곳이 나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이것이 LKY(LEE KWAN YEW)와 PAP(People's Action Party)의 위대한 사회공학이자 넛징 스킬인가..
거대한 루이비통 매장을 지나서
예쁜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장소가 참 많이도 조성되어 있었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의 내부.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은 2010년에 쌍용건설이 시공한 호텔인데, 싱가포르의 랜드마크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런데 내부에서 위를 바라보니, 뭔가 리콴유가 좋아할 것 같은 싱가포르 공공주택(= 주공아파트) 감성이 펼쳐져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도 싱가포르의 이데올로기는 표현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과잉 해석이겠다만...
마리나 베이 샌즈를 지나서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 도착했다. 2012년에 개장한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인공 정원이고, 저 외계 행성에 나올 것처럼 생긴 나무는 슈퍼트리이다. 입장권을 사고 올라가볼 수 있는데 전망이 꽤 좋았다. 여담으로 저 슈퍼트리 나올 때까지 걷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슈퍼트리 전망대에서 보면 말라카 해협 앞에서 입항을 대기하고 있는 엄청난 선박의 무리들을 볼 수 있다. 저 선박들이 모두 싱가포르에 돈을 낼 것을 생각하면, 싱가포르가 무에서 유를 건설한 것만은 또 아니긴 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입지가 싱가포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해협이 중동과 동아시아를 이으면서 세계 경제의 대동맥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미국의 제해권으로 이 좁은 바다를 틀어 막는 참사를 막기 위해서 중국이 유라시아 전역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와닿았다.
첫째 날 마지막 일정은 차이나타운.
대체 중국인들로 바글대는 이 나라에 '차이나타운'이 왜 있어야 하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사실 우문이었다. 첫째로, 역사적으로 이 곳에서부터 중국인들이 정착했기 때문에 그 역사성을 잇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어쨌든 싱가포르의 이데올로기는 '중국계 싱가포르인'
차이나타운에서 나오면 뭔가 홍콩 영화에서 봤을 것 같은 건물이 반겨주는데, 한자로는 진주방, 영어로는 People's Park Complex라고 하는 50여 년 전에 지어진 주상복합 건물이라고 한다. 싱가포르 도심부는 초현대 건물로 가득한데, 조금만 벗어나면 나오는 옛날 건물이 싱가포르도 하루 아침에 지어지지 않았음을 실감나게 해준다.
사실, 차이나타운 하면 으레 떠오르는 왁자지껄하고 떠들썩한, 또 나쁘게 말하면 혼잡하고 비위생적인 것 같은 느낌은 거의 없었다. 역시 차이나타운이래봤자 싱가포르기에, '잘 관리되고 있음'을 어필하는 것 같았다.
"대중국"
2007년에 완공된 불아사. 부처의 치아를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정보가 전혀 없이 1층만 슥 돌고 나와서 심히 안타깝다. 인근에는 힌두 사원, 도교 사원, 이슬람 사원이 모두 있는데, 종교 간 화합을 추구하는 정부의 의도적 배치인 것도 같다.
맥주를 마시며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과 머라이언을 바라보고 소남도에서의 첫째 날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