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도상륙(昭南島上陸) - 3

소남도상륙(昭南島上陸) - 3

식민지 조선인의 발자취를 찾아 창이 포로수용소 박물관 방문

임명묵

금요일에는 저녁에 싱가포르에 거주하시는 교민 분들과의 약속이 있었다. 페이스북으로 알게 된 지인분께서 이 동네로 오라고 해서 왔는데, 초현대 국제도시 싱가포르와는 다른 한적한 주택가가 인상적이었다.

이 지역은 티옹 바루(Tiong Bahru)라고 하는 지역인데, 싱가포르주택개발청(HDB)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영제국 시기 싱가포르개발신탁(Singapore Improvement Trust)에 의하여 최초로 개발된 지역 중 하나라고 한다. 싱가포르 독립 이후에 이 지역을 필두로 HDB가 싱가포르 주택 공급에 앞장 섰는데, 모든 개발이 그렇듯이 세월이 50년 넘게 지난 지금에는 한국 2기 신도시 주공 아파트-빌라 감성이 가득한 옛 동네가 되었다.

이러한 낡고 한적한 이미지가 '힙하게' 소비되는 것은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인 듯 하여, 최근에는 빠르게 힙한 가게들이 들어서며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사진은 2006년에 연 티옹 바루 마켓 + 호커 센터. 호커 센터는 싱가포르 주택가 등지에 위치힌 식당가인데, 에어컨이 없이 천장 선풍기가 돌아가면서 이곳 저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복합 시설이다. 야외 음식점들의 위생 문제를 관리, 해결하기 위해서 싱가포르에서 적극적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호커 센터에서 먹지는 않았고 인근의 중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와서 싱가포르의 대표 음식 칠리 크랩을 시켜 먹었다. 튀긴 게를 토마토와 고추 소스와 함께 먹는 칠리 크랩은 싱가포르에서 만들어진 음식인데, 1950-6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싱가포르에 왔으니 칠리 크랩을 먹어보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여, 덕택에 맛있게 칠리 크랩을 먹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3차까지 가서 부어라 마셔라..

그랩 택시로 인근의 탄종 파가르로 이동했는데, 여기에 최근 한식당들이 굉장히 많이 생겼다고 한다. 싱가포르에서 구워 먹는 돼지갈비와 라면 사리 풀은 된장찌개 맛은 각별했다.

식당 맞은 편에 위치한 또 다른 식당인데, 한자와 아랍 문자가 같이 있는 것이 참으로 싱가포르답다고 느꼈다. 아랍 문자를 잘 읽지는 못하는데 떠뜸떠뜸 읽어보면 '아이셰'라고 써 있는 듯..

싱가포르 출국날의 마지막 행선지는 창이 박물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창이 공항과 매우 가까워서 공항 가기 전에 잠깐 들리기 좋았다. 물론 공항에서 걸어가기에는 빡센 곳이라, 여기서 그랩 택시를 잡아서 다시 공항으로 이동하느라 돈이 좀 깨지긴 했다.

창이 감옥은 원래 1936년에 영국 식민 당국이 세운 새로운 형무소였는데, 1942년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하여 영국군 포로 수용소로 변모했다. 영국 식민지에서 생포한 호주나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군은 물론이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인들도 창이 감옥에 수감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싱가포르 정부에 의하여 구 창이 감옥이 헐리고 인근의 신설 교도소로 이전되었는데, 앵글로 세계에서는 제2차세계대전의 기억이 담겨 있는 곳으로서 보존 요청이 꽤 있었다고 한다. 훗날 이곳은 일본 점령기 포로들의 생활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싱가포르가 아무리 일본군 점령지 중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곳이었다고 하더라도, 자국민에게도 가혹한 일본군이 '귀축영미' 포로들을 제대로 대우해줄 리가 없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은 포로들이 많았고, 또 동남아시아 전역의 노역 현장으로 동원되는 사람도 많았다.

일본 점령기의 소남도 지도.

실제 수감자들이 살았던 방을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악명 높은 콰이강의 다리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끌려간 포로들의 이야기.

마지막에는 영국군에 의하여 소남도가 다시 싱가포르로 해방되면서, 일본군들이 이곳에서 재판을 받고 수감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의 지배자였던 영국인들이 설치한 감옥을, 일본군이 빼앗아 옛 지배자인 영국인을 수감하는 데 쓰고, 다시 그 영국인이 돌아와 일본군을 처벌하는 데 썼다는 데서 아이러니가 돋보이는 공간이었다. 물론, 최후에 이 감옥을 가장 알뜰하게 썼던 사람은 그 둘이 아니라 리콴유였다.

굳이 시간을 내서 이곳에 방문한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수감되었던 조선인의 발자취를 쫓기 위해서였다.

실제 조선인 군속으로 소남도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포로 수용소의 군속으로 근무했던 최영우 씨의 일기를 그의 손자가 정리하여 출판한 책인데, 작년에 이 책을 각별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전쟁이 총력전으로 확대되며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해야 했던 일본이 있었고, 그리고 일본 제국 체제 속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인정을 받고 싶었던 식민지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군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일부는 군속(군무원)으로서 주로 포로수용소의 포로감시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최영우의 일기에는 전북 시골 출신의 식민지 청년이 일본군을 따라 사이공과 싱가포르, 자바와 같은 거대한 남방 세계, 유럽 식민지 세계와 마주하는 경험이 담겨 있고, 근무 중 네덜란드-자바인 혼혈 여성과의 로맨스도 그려져 있다.

하지만 조선인 군속들은 일본의 패전 이후에 뒤바뀐 운명을 감내해야 했다. 포로를 감시하던 그들이 이제는 돌아온 영국군에 의하여 다시 포로로 수감되었다. 최영우도 잠시 창이로 옮겨가서 복역해야만 했다. 그리고 열악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직접 마주하는 대상이었던 조선인 군속은 첫째 가는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최영우가 기록한 것처럼, '백인을 죄수로 부린다'는, 역전된 인종 위계에서 비릿한 우월감을 느끼는 조선인도 있었다.

이후 전후 재판에서 이들은 당연히 처벌 대상이 되었고, 조선인 군속 10여 명은 포로 학대 등의 혐의로 재판 후 처형되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징역 살이를 했다.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사람도 고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기다려야 했다. 최영우는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에서 자카르타 형무소를 거쳐 1947년에 고향으로 귀환했다.

박물관에는 과거 포로들이 이용했던 예배당을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1988년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 문장 써주고 왔다.

전시관을 다 돌고 나오면은 관련 상품을 파는 기념품점이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서적 코너가 꽤 크게 있었다.

학술서들은 모두 싱가포르 국립대 출판부에서 출간된 연구 저작인 것 같았다. 이 책은 소남도 시절에 일본 제국 조사부에서 싱가포르 통치를 위하여 조사한 조사 보고서의 번역이다.

싱가포르에서 활동한 주요 일본 정부 인사인 시노자키 마모루의 회고록이다. '일본의 쉰들러'라고 불리며 중국인에게 인도적으로 대했다고 하지만 위키백과에 가니 전시 범죄 연루 문제로 논란이 무척이나 많은 인물인 것 같다.

제2차세계대전과 싱가포르의 형성, 동남아시아의 탈식민화와 대영제국 해체에 대한 여러 연구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시간은 가고 읽을 것은 늘어만 간다는 것을 실감하며, 싱가포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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