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와 이슬람의 도시, 타슈켄트 - (2)
돌의 도시 타슈켄트 활보
이곳은 타슈켄트 지하철의 역 중 하나인 알리셰르 나보이 역. 알리셰르 나보이는 티무르 제국 시대인 15세기에 아프가니스탄 헤라트에서 활약한 문인인데, 소련 때부터 우즈베크 민족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물론 근대적 민족 개념을 이 시기로 소급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페르시아어만이 제대로 된 문어 전통으로 간주되는 가운데 알리셰르 나보이가 튀르크어의 일종인 차가타이어를 바탕으로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 차가타이어로 남긴 그의 문학들은 훗날 중앙아시아의 문예 전통이 페르시아어에서 튀르크어로 전환되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나보이 거리는 물론이고 나보이 시, 나보이 동상과 극장 등을 보기 매우 쉽다.
승강장 양쪽 벽에는 그의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들이 놓여 있는 듯 했다.
알리셰르 나보이 역에서 환승해서 온 곳은 무스타킬릭 마이도니(독립 광장) 역. 1977년 타슈켄트 메트로 개통식을 여기서 했을 정도로 타슈켄트 가장 중심에 있는 곳이고, 그래서 역도 가장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소련 이전에는 원래 '레닌 광장 역'이었는데, 소련 시절 모든 도시의 중심은 레닌 광장이고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는 레닌 대로니까 여기는 언제나 늘 중심이었던 곳이다.
독립 광장 역 바깥으로 나오니 밝은 햇살이 비춰주고 있었다. 사진만 봐도 뜨겁다..
이곳이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중심지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데, 로마노프 왕가의 대공이 사용하던 저택이다. 8년 전에도 이곳부터 타슈켄트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기억에 선하다. 지금은 보수 공사 중이라서 들어갈 수는 없다.
바로 인근에 샤로프 라시도프의 동상이 있다. 이전 '우즈베키스탄 개황'에서 설명했듯, 그는 사마르칸트 파벌의 지도자이자 모스크바 중앙에 있는 서기장 브레즈네프의 친구로서 우즈벡 SSR을 20년 가까이 통치했다. 목화 스캔들로 안드로포프 시기에 숙청 당하며 옥사했지만, 여전히 우즈베키스탄의 노인들은 그를 나름 우즈벡의 이해관계를 위해 노력한 게 많은 지도자라고 여긴다고 들었다.
브레즈네프 시대(1964-1982)에는 이처럼 중앙과 합작해서 사실상 봉건적 통치자처럼 그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한 지도자들이 꽤 많았는데, 우즈벡에 라시도프가 있다면 카자흐스탄에는 딘무하메드 쿠나예프가 있는 식이었다. 쿠나예프도 64년부터 86년까지 카자흐스탄을 다스렸는데,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세대교체를 시작하면서 해임되었다. 그가 카자흐인들을 더 우대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카자흐스탄과 연고가 없는 러시아인 후임자가 오게 되면서 카자흐스탄에서는 젤톡산 봉기라고 하는 유혈 폭동도 발생했다.
이 시기 지방 통치자 중에서 가장 잘 풀린 것은 아제르바이잔의 헤이다르 알리예프다.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아제르바이잔을 통치했고, 독립 후 혼란기인 1993년에 대통령으로 복귀하여 2003년까지 통치했다. 게다가 2대 세습까지 성공시켜 그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집권 중이다. 일함 알리예프는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니 어쩌면 삼대 세습도 노릴지도...
타슈켄트를 대표하는 멋들어진 건물인 이곳은 우즈베키스탄 국립 역사 박물관이다. 개관 자체는 한참 전부터 했던 곳이지만 지금의 건물은 1970년에 소비에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8년 전에 갔었는데, 우즈베키스탄의 고고학으로 시작해서 티무르 제국을 거쳐 소비에트와 카리모프로 이어지는 전체 역사를 서술한다. 티무르 시기가 시작될 때 나오는 거대한 그림이 장관이었던 기억. 요새는 어떻게 바뀌었나 모르겠다.
타슈켄트 핵심인 아미르 티무르 광장으로 가는 길. 이곳도 나름 젊은이들이 모여 노는 중심 거리 중에 하나인데 관광객도 많이 와서 이런 예쁜 초상화를 죽 전시해놓고 팔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호텔인 '호텔 우즈베키스탄'. 1974년에 소련이 지었고 역시나 웅장한 소비에트식 건축으로 나름 유명한 건물이기도 하다. 소련 시절부터 국제 손님을 맞이하는 주요 창구 중 하나.
타슈켄트 최고 중심가인 아미르 티무르 광장 도착. 거대한 티무르 기마상이 맞이해주는 곳이다. 이런 도시의 중심 공간을 국가가 어떻게 점유하고, 또 새로운 공간을 생산하는지는 국가 정체성 만들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티무르 광장도 마찬가지다. 1913년까지 이곳에는 타슈켄트의 사자로 불린 러시아 제국의 장군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의 상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오시프 스탈린 동상이 건립되었고, 탈스탈린화로 인하여 없어진 다음에는 공산주의의 시조 카를 마르크스 동상이 세워졌다. 독립 후에는 그마저도 치워져 우즈벡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라는 아미르 티무르가 세워진 것이다.
1996년, 독립 국가 지도자가 된 지 만 5년도 안 된 카리모프가 '아미르 티무르 탄생 660주년'을 기념하여 이 해를 티무르의 해로 지정하였다. 이 박물관도 '아미르 티무르 박물관'으로서 그 이후에 개관했는데, 티무르 제국과 관련된 여러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양식은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영묘인 구르 아미르의 양식을 참조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조금 걸은 뒤에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를 시켜서 마셨다. 정말 구원 받는 느낌이다. 한국인이 더 많아서 그런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모스크바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기가 훨씬 쉬운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카페나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달라고 하면 직원의 얼굴에 뜨는 물음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나를 다시 놀라게 한 우즈베키스탄 지폐들. 한국 1원이 우즈베키스탄 숨으로 대충 10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충 사진의 2만숨, 10만숨, 5만숨이 각각 2천원권, 만원권, 5천원권인 셈이다. 최고액권은 20만숨이니까 2만원권.
내 기억 상으로는 8년 전에는 물가나 환율도 지금하고 많이 달라서, 1원에 한 4숨쯤 했던 것 같다. 시장에서 샤슬릭을 한 꼬치 사면 그때는 4천숨(천원) 정도 했다. 지금은 8천숨인지 만숨인지 받았는데 어쨌든 한국 돈으로 대충 천원인 건 매한가지다.
문제는 8년 전에는 최고액권이 5천숨이고, 이 5천숨이라는 것도 2013년에 추가된 거라서 2015년 기준으로는 시중에서 거의 볼 일이 희박했다. 대부분 1천숨, 그러니까 당시 가치로 250원으로 모든 거래를 해야했던 것... 당시는 카드 받는 곳도 거의 없었던지라, 10만원을 환전하면 40만숨이 왔는데 1000숨 지폐로 400장이다.. 일행이 6명이었으니까 그래도 어디 그럴싸한 식당에서 밥이라도 먹으면 몇 만원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때마다 몇십장, 몇백장 넘는 천숨짜리 지폐를 하염 없이 세면서 계산을 해야했다. 게다가 시장에서 환전하면 무슨 쇼핑백에다가 지폐 더미를 가득 담아서 줬고... 그걸 또 고이 가져가겠다고 가방에 꽁꽁 숨겨두느라 하여간 애썼던 기억이 새록새록.
어쩄든 환율 개혁, 화폐 개혁이 나름 고통을 감내하고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 같다. 저런 미친 짓을 안 해도 되고 무엇보다 이제 카드를 다 받는다..
쨍한 거리, 널찍한 나무 그늘 길.. 이것이 중앙아시아
열심히 걸어서 8년 전에 온 성지에 다가간다.
안디잔에 생긴 대우 공장 덕분에 우즈베키스탄은 일찍부터 대우 왕국으로 유명하다. 지방에 가면 다마스가 버스처럼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것도 볼 수 있겠으나 타슈켄트에서는 그 풍경은 좀 사라진 것 같다. 그래도 마티즈류 차량을 쉽사리 볼 수 있다. 덕택에 현대차 보기가 이상하게 어려운 곳..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눈으로 직접 본, 타슈켄트 시민 영광 기념상. 1966년 4월 26일 도시를 직격한 지진을 시민들이 용기로 버텨내는 것을 표현한 역작이다. 당시 리히터 5.2의 지진이 타슈켄트 중심가를 그야말로 직격해서 도시 전체가 완파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사망자는 10여 명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집계에 따라서는 수백명을 얘기하기도 하는 모양이다만). 그러나 중앙아시아 최대의 대도시에 순식간에 집을 잃은 이재민이 엄청나게 발생한 상황. 소련 중앙 당국에서는 우선 구조대를 급파하고, 내친 김에 도시 재건 계획을 통해 타슈켄트를 동서가 하나가 되는 현대 도시로 재탄생시키고자 한다. 위에서 본 호텔 우즈베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국립 박물관이나, 무엇보다 타슈켄트 지하철도 다 그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건설된 건물들이다.
타슈켄트 복구를 위해서 모스크바는 모든 민족 공화국들이 어려움에 처한 타슈켄트를 도와야 한다고 선전하며 타슈켄트 재건 공사 노동자를 모집했다. 국가적 프로젝트를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소비에트 민족 우애 선전은 역사가 유구한 것이었다. 실제 사람들은 이런 선전에 진심으로 반응하고는 하였지만, 물질적 인센티브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전후에 성장한 1960년대 소련의 신세대들은 예전과 같은 열악한 공동주택이 아니라, 사생활이 보장 받는 핵가족을 위한 아파트에 살고 싶어했다. 흐루쇼프 때부터 이런 젊은이들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이 시기 건설된 성냥갑짜리 5층 아파트들을 '흐루쇼프카'라고들 부른다.
지어진 지 60년 다 되어가는 건물들이라 지금 보면 다 쓰러져가고, 실제로 지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도 방음을 비롯한 온갖 문제가 속출하는 소련 아파트였으나, 소련의 젊은이들은 그마저도 너무나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뤄지는 주택 건축 때문에 좋은 도시의 좋은 주택을 빨리 배정 받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고.. 그러던 와중에, 타슈켄트 재건 공사에 참여하면 타슈켄트의 아파트 입주권을 먼저 받을 수 있다는 당근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소련 전역에서 젊은 노동자를 모집하기 위한 당근 정책은 타슈켄트의 우즈벡인에게 굉장한 불만을 야기했다. 이들은 그렇게 좋은 현대 도시를 건설해줄 것이라면, 당연히 우즈벡인이 그 수혜를 먼저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국은 우즈벡인에게도 빨리 재건 주택에 입주할 수 있도록 계획을 다 짜두었지만, 타슈켄트의 우즈벡인들은 계속되는 러시아인들의 유입과 러시아인 중심의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차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는 1969년에 타슈켄트의 파흐타코르 경기장에 있었던 축구 경기였다. 여기서 타슈켄트 팀이 러시아팀한테 패배하면서 훌리건들의 난동이 시작됐고, 우즈벡인이 대거 도시 폭동에 참여하면서 정부가 타슈켄트의 통제력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 '파흐타코르 사건' 당시 무슬림들은 유럽식 생활을 뽐내는 우즈벡 여성을 린치하거나 러시아인을 공격하는 등 사태가 갈수록 심각해졌으며 결국 중앙 정부 무력이 개입하면서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다.
한편 파흐타코르 사건을 계기로 소련 공산당은 우즈벡인의 민심을 아우를 수 있는 현지 유력자를 더 지원할 필요성을 느꼈고, 라시도프가 사마르칸트 파벌로 우즈벡 공산당 수뇌부를 채우는 것을 용인해주었다.
이런 운하들이 또 타슈켄트에서 볼 수 있는 예쁜 풍경 중 하나다.
순직한 우즈벡 군인이나 경찰들을 기리는 추모비 같았다.
타슈켄트 미생물학 연구소라고 한다. 다음 목적지 지나가는 길에 보이길래 찍었다. 건물도 멋들어지고..
미생물학 연구소 바로 옆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국제 이슬람 아카데미. 이것이야말로 소비에트와 이슬람의 교차 아닐런지?
원래 이곳에 있던 몽골 후계 국가인 모굴리스탄의 유누스 칸 영묘를 찾아가려 했었는데, 보수 공사 관계로 당분간 휴관이라고 한다. 아쉬운 데로 근처에 있는 수피 성인 영묘 같은 곳을 슥 둘러보았다.
사실 중앙아시아 수피즘 역사를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런 거 8년 전에 너무 많이 봐가지고 별 감흥은 없긴 하다.. 그래도 타슈켄트에서는 상대적으로 귀한 편인데, 1966년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과거 건축물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구시가지는 처르수 바자르 인근에 조금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코란도 전시되어 있다.
저녁으로 중앙아시아, 특히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을 대표하는 민속 요리 '베시바르막'을 먹었다. '다섯 손가락'을 뜻한다. 넓적한 만두피, 아니면 수제비 같은 국수(?)와 고기를 같이 곁들여 먹는다. 보통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는 대가족이 식사할 때, 혹은 잔칫날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라고 한다.
맥주 한 잔 먹으며 아 좋구나~
이제 사마르칸트를 향하여. 8년 전에 타슈켄트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는데, 숙소를 일단 역에서 열차 기다리면서 자는 공용 숙소를 예약해놔가지고 저기서 하룻밤 묵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해외 처음 나온 데다가 러시아어도 써본 적이 없어서 모든 게 깜깜했던 기억... 일단 역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역 바깥에 놓인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미리 예약해둔 기차표와 여권 보여주고 폭발물 검사기에 가방 통과시키면 끝.
역 들어갈 때 한 번 더 검문을 통과해준다. 이번엔 폭발물 검사만 통과하면 된다. 부하라에서는 기차에 탈 때까지 이 짓거리를 네 번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8년 만에 와보니 훨씬 절차가 간소화되고, 경찰들 표정도 많이 풀어진 느낌.
왼쪽 열차는 시속 200km로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를 오가는 나름 고속철 아프로시압이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가 300km쯤 되니까, 1시간 반 정도면 가는 셈. 꽤나 인기가 많은 노선이라서 나는 예약할 수가 없었다.
내가 타는 건 일반 열차였는데 3시간 반 정도 걸렸다. 시속 80km 언저리로 운행했던 듯...
기차도 뭔가 훨씬 좋아진 느낌이다. 쿠페 차를 개조해서 침대를 들어낸 다음에 6인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마련해줬고, 방마다 에어컨이 다 설치되어 있고 휴대폰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도 이것저것 많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도시 밖을 조금만 벗어나면 인터넷이 안 되기가 일쑤인데, 여기서는 3시간 반 내내 어지간하면 편하게 인터넷을 할 수가 있었다. 배터리 아낄 필요 없이 객실 복도에서 실시간으로 보급을 받으며, 웹툰이나 보면서 티무르 제국의 고도 사마르칸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