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동경(雨中東京) (3)

우중동경(雨中東京) (3)

이틀차의 스산한 밤 그리고 돌아가는 날.

임명묵

친구의 동경대 친구분께서 알바를 가셔야 했기에 야스쿠니에서 배웅해드렸다. 그 뒤에 향한 곳은 황거 동쪽 오테마치 역에 있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머리 무덤.

다이라노 마사카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헤이안 시대인 10세기 초에 지금 동경이 있는 동국(東国)에서 교토의 조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냥 반란도 아니고 일본사에서 거의 전무후무하게 자신이 천황을 대체하겠다며 자신을 '신황'이라고 칭했다(원래 역성혁명으로 대충 생각했는데 다른 분께서 마사카도가 천황의 후손임을 근거로 신황을 자처해서 '역성'혁명은 아니라고 한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란은 조정에 의해 진압 당했고, 그는 교토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참수 당하고 효수되었다. 워낙 일본의 맥락에서는 충격적인 일을 감행한 인물이라 각종 전설의 소재가 되었고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원령이 되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전설이, 교토에 효수되었던 그의 머리가 눈을 부릅뜨고 말을 하다가 하늘로 솟구쳐 다시 동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머리가 당시에는 늪지대에 불과했던 오늘날 동경 지역에 떨어졌기에 그의 원령을 달래고자 이렇게 머리 무덤(두분)을 만들게 되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그 후에도 동국 지역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신으로 모셔졌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에도 막부도 매우 높은 신격으로 존숭했다. 아키하바라 근처에 있어서 유명한 간다 명신(묘진)이 그를 기리는 신사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 도쿠가와 막부와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모두 천황을 거역하고 능멸한 이들로 다시 격하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여럿 전설이 만들어졌다. 마사카도의 신사를 철거하려 하자 스미다강에 이례적인 뇌우가 쏟아졌다는 이야기나, 관동 대지진 이후에 이 머리 무덤을 재개발로 없애려 했을 때 관련자들이 의문사를 했다는 이야기 등등.

하필이면 방문한 날도 뭔가 음산해서 귀기가 더욱 돋보였다. 거대한 마천루 사이에 이런 묘가 조그맣게 있는 걸 보자면 정말 없던 영기도 스며드는 느낌이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딸이라는 다키야샤히메가 소환한 해골 요괴.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1844년 그림.

그 다음으로 다시 우에노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공원을 한 곳 방문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미학자이자 사상가인 오카쿠라 텐신(오카쿠라 가쿠조, 1863-1913)이다. 이 공원은 원래 그의 집이 있었던 자리라는데, 지금은 작은 공원을 만들어 두어 오카쿠라 텐신을 기념하고 있다. 원래는 여기서 조금 더 떨어진 오카쿠라의 묘까지 방문하고 싶었는데, 시간 상 미처 방문하지 못해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오카쿠라 텐신,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오카쿠라는 메이지 시대의 격동기 속에서 주로 미술을 공부하고, 동양인의 관점에서 본 동양 미술과 미학이라는 주제에 평생을 천착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영어를 몹시 잘하였기에 보스턴 미술관을 비롯하여 서구 세계의 지적 네트워크 속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고, 그 덕택에 오늘날에도 전세계적으로 아시아 미술, 나아가 아시아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나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나눈 친분과 교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카쿠라 사상의 핵심은, 광대한 공간에 서로 다른 문화를 지녀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지역인 '아시아'를 관통하는 정신을 찾아내는 것에 있었다. 그는 주로 불교를 통해서 아시아의 양대 문명인 중국 문명과 인도 문명이 연결된다고 생각했고, 일본에서 제 아시아 문화와 예술이 종합을 이룰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 "동양의 이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시아는 하나다. 공자의 공동사회주의를 가진 중국 문명과 베다의 개인주의를 가진 인도 문명을 히말라야가 가르고 있는데, 이는 오로지 강력한 두 문명을 두드러져 보이게 할 뿐이다. 하지만 그 눈 덮인 장벽조차도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향한 열망의 드넓은 확장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 열망은 모든 아시아 민족에 공통된 사유의 유산을 물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를 낳게 할 수 있었고, 또 개별적인 것에 골몰하면서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을 탐구하는 지중해·발트해 연안 민족과 구별되게 하였다."

사실상 아시아주의를 상징하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고 후대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 바가 있다. 아시아언어문명학부 학생들로서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동상을 보니 참 여러 생각들이 밀려 들어왔다.

아 무언가 이토 준지 만화에 나올 것 같은 그네....가 또 음산하게 우리를 쳐다보는 듯 했다.

다음 행선지는 이케부쿠로. 그중에서도 이케부쿠로 동쪽으로 나아갔다.

저기 큰 건물이 아마 이케부쿠로의 명물 선샤인 60인 듯 한데, 다음 행선지도 이 건물과 관련이 조금 있다. 이케부쿠로 선샤인 60은 1977년부터 1985년까지 아시아 최고층 건물이라는 지위를 자랑했던 240m의 마천루다. 1985년에는 한국의 63빌딩에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사실 원래 이 자리는 과거 동경 구치소가 있던 터다. 일본 정부에 의해 운영되던 이 구치소는 1945년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였을 때 GHQ가 접수하여 태평양 전쟁의 전범들을 수용하던 '스가모 형무소'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도조 히데키, 기시 노부스케 등 유명한 전범들이 이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일부는 극동군사재판의 판결로 처형되었다.

스가모 형무소, 1948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58년에 마지막 전범들이 스가모에서 가석방되었고, 1962년에는 감옥으로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971년에 건물은 해체되었고 이 지역은 전후 고도성장 속에서 팽창하는 동경의 중심지로 재개발되었는데, 선샤인 60도 그런 맥락에서 건설된 마천루였다. 옛 형무소 자리의 일부는 남겨두어 히가시이케부쿠로 공원으로 조성했다.

여기가 형무소였음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바로 이 형무소터 비석이다. 영구평화라고 쓰여 있다.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찍어서 뭔가 눈물이 흐르는 것 같은 스산한 느낌이 돋보였다...

형무소 터 비석 옆에는 공원답게 이렇게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악명 높은 전범들을 가두었던 형무소 터라는 사실을 알고 날씨와 계절까지 이 모양이니 정말 공간에서 귀기와 음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 했다.

특히 나무에 걸쳐둔 저 그림들은.... 색감은 밝은데 뭐 이리 음산하고 불쾌한지... ㅋㅋㅋ

신오쿠보로 돌아오니 노기 신사, 야스쿠니, 오카쿠라 공원, 스가모 형무소 터를 관통하는 음산한 기운을 씻겨주는 한류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립습니다..

여전히 트와이스 충성파들이 많은가보다.

한류를 즐기러 나온 청년들로 시끌벅쩍한 거리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절.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둘째날을 마무리 하며 인근의 야키니쿠 집에 들어갔는데 AKB 아이돌 팬이신 것 같았다.

3일차는 여행으로 놀러 온 두 친구만으로 시작하고 다른 친구는 월요일이라 다시 연구에 매진하러 갔다. 요시노야 앞에 광고 모델분은 어딘지 최예나를 닮은 느낌이다..

규규 카레

잠깐 다른 목적으로 신주쿠에서 1시간 거리 떨어진 교외를 다녀오고..

2박 3일 동경 근현대사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는 다마령원(多磨霊園). 흔히 다마 공동묘지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1923년에 개원한 이래로 동경에 거주했던 일본 명사들의 묘로 쓰이고 있으며, 역사적 유명 인물의 묘를 많이 만나볼 수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비슷하다.

다마령원 입구. 다마레이엔(다마령원) 역과 다마 역이 있는데, 다마 역이 훨씬 더 가깝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틀면 미타마 납골당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1962년에 추가되었다고 한다.

내부는 꽤 웅장하다.

슬슬 우리가 방문하러 가는 묘를 찾으러 출발. 전날의 부슬비가 아니라 정말로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차분한 빗소리가 너무 좋았다. 다마령원에는 묘에 따라서 구-종-측-번에 따른 주소가 써있어서, 묘지가 꽤 넓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발품을 팔면 원하는 인물의 묘를 찾는 것 자체가 크게 어렵지는 않다. 어떤 인물의 묘가 몇번지인지는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하면 다 나오기 때문이다. 노보데비치 같은 러시아 쪽 수도원 묘지는 이러지가 않아서 찾기에 애를 먹을 때가 좀 있었다.

일단 첫번째로 방문한 묘지는 라시 베하리 보스의 묘.

라시 베하리 보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는 같은 성씨인 인도 국민군의 지도자인 찬드라 보스와 친척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그 역시 일본 동경을 거점에 두고 인도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 운동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는 인도에서 반영 혁명 투쟁에 나서다가 1915년에 일본으로 도피하면서 정착했고, 1923년에는 아예 일본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인 묘역에서 찾아도 도저히 나오지가 않았고, 일본인 묘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처음에 찾는 데 조금 헤맸다.

베하리 보스는 훗날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를 통해 인도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고,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 창설을 독려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처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마사히데 보스를 전쟁에 보내 잃기까지 했다. 1945년 1월에 전쟁의 패배를 목전에 두고 결핵으로 사망했다.

라시 베하리 보스 역시나 인도와 일본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전히 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모디 정부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수시마 스와라지는 "라시 베하리 보스와 네타지 찬드라 보스, 라다비노드 팔"이라는 세 인물이 일본과 인도 우호 관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며 추켜 세웠다. 공교롭게도 이번 여행에서 세 인물의 흔적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방문한 묘는 이 곳. 묘비의 높이가 좀 컸는데 뒤에 묘석을 밟지 않으면서 전체 사진을 찍으려고 고생 좀 했다.

카디(법관), 하지(메카 성지순례자) 압두레시드 이브라힘. 1852년에 태어나서 1944년에 죽다.

실제로는 1857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압두레시드 이브라기모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의 이름은 압두레시드 이브라힘이지만, 그의 고향인 러시아에서는 그는 '압두레시드 이브라기모프'라는 다른 형식의 이름이 있다.

그는 러시아 제국 시베리아의 토볼스크(현 옴스크 주)에서 태어났다. 전통 이슬람 교육을 받은 그는 새롭게 변모하는 세계를 보고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전역을 활발히 이동한 당대의 방랑인이었다. 카잔, 모스크바, 오데사, 이스탄불, 메카, 메디나, 오렌부르크 등 오늘날 러시아와 터키의 국경을 계속해서 넘나들며 그는 자신의 출신지를 뛰어넘는 방대한 정치적 상상과 사회적 비전을 발전시켰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는 자디드주의라는 근대적 이슬람 개혁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는데, 압두레시드 이브라힘 또한 그러한 자디드 운동에 동의를 하는 이였고, 러시아를 방문한 위대한 이슬람 사상가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각성은 러시아 제국 내의 무슬림들의 계몽과 해방을 촉구하며 점차 당국의 경계를 사게 되었다. 불필요한 마찰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던 오스만 제국의 황제 압뒬하미드 2세 또한 압두레시드 이브라힘을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추방했다. 러시아에서는 여러 활동을 계속 펼쳤으나 감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는 아시아 국가는 자신이 태어난 러시아나, 무슬림의 지도 국가인 오스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떠오르는 강대국 일본이었다. 그는 1902년에서 1903년까지, 1908년에서 1909년까지 두 번 일본에 방문했다. 그는 일본을 무슬림들이 따라야 할 모범적인 아시아 근대화의 상징으로 추켜 세웠고, 일본이 러시아를 극동에서 압박하면 러시아 무슬림들의 해방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특히 두 번째 방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일본의 아시아주의 단체인 흑룡회와 매우 긴밀히 접촉하기도 하였다. 동경이 발하는 아시아주의의 메시지는 시베리아의 이슬람 지식인도 매혹시켰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무슬림 세계의 식민 제국인 영국과 러시아의 동맹이 패배하고 무슬림 국가의 대표인 오스만 제국과 그 동맹인 독일이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두 제국 내부의 무슬림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와중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둘 다 해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범이슬람주의-아시아주의 사상가로서 그는 신생 터키에서는 영국에 대한 저항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고,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주도 하에 민족 평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하지만 두 국가는 모두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볼셰비키 입장에서 그와 같은 민족 엘리트는 결국에는 차르나 백군을 향해 맞설 때 손 잡는 임시 동맹이었다. 압두레시드 이브라힘은 무슬림 해방을 원했고 볼셰비키는 공산주의 혁명을 원했다. 그는 볼셰비키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죽지는 않고 추방되는 선에서 끝났다. 한편 세속주의 터키 공화국에서도 압두레시드 이브라힘의 종교적 성향과 아랍 국가들 전체를 선동하는 공세적인 태도를 부담스럽게 여겼다. 터키는 이제 세속주의를 통해 합리적인 근대화로 나아가야 했고, 호시탐탐 터키를 노리는 서방 국가들을 구태여 자극하는 일은 더는 하면 안 되었다. 아타튀르크와 그의 동료들이 보기에 압두레시드 이브라힘은 정반대의 위험천만한 사상을 주장하고 있었다. 터키도 그를 추방했다.

결국 수많은 국가를 방랑한 그는 1933년에 일본의 초청을 받아 동경으로 갔고, 80대의 나이가 되어서야 아시아주의의 수도인 동경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다. 1938년에 그는 동경 모스크의 이맘이 되어 1944년 죽을 때까지 봉직했다. 그가 제2차세계대전과 일본의 진주만 공격, 남방 작전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몹시 궁금해지는데, 찾기가 쉽지 않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자와 아랍 문자(아마 나스탈릭체?)가 함께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비석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할 묘는 '소련 영웅 리하르트 조르게'라고 써있는 이 묘다.

리하르트 조르게,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역사에 관심이 조금만 있어도 알게 되는 유명한 인물이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독일계로 태어난 그는 소련 공산주의에 투신했다. 소련이 그에게 맡긴 임무는 독일인의 신분을 활용해 나치당에 가입하고 추축국의 각종 정보를 빼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령지가 바로 동경이었다. 나치 신문 기자로 신분을 숨긴 채 소련의 간첩으로 활약한 그는 독일의 소련 침공 날짜를 빼오기도 했고(스탈린이 묵살했지만), 모스크바 전투라는 백척간두를 앞에 두고 일본이 극동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다(이 정보는 수용했다). 그 덕택에 스탈린은 극동군을 이동시켜 모스크바 전투에 신속히 투입하여 소련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발각되어 전날 방문하였던 스가모 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일본인 연인 이시이 하나코가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다마령원에 매장할 수 있었고,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도 계속 받았다. 오늘날에도 5월 9일 대독승전기념일에 일본의 러시아 대사는 이곳을 참배한다고 한다.

이 날 작정하고 방문하기로 한 세 명의 묘는 모두 보았고 이제는 하네다 공항을 향해 바쁘게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 겸사겸사 몇몇 인물들의 묘를 들르면서 가기로. 이 묘는 오사카 만국 박람회의 상징물인 태양의 탑을 만든 오카모토 타로의 묘.

태양의 탑,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동경은 참 나무가 큼직큼직하다.

우리에게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유명한 오히라 마사요시 전 총리의 묘도 여기에 있다.

벤 버냉키가 존경했다는 일본의 대장대신(재무장관)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묘. 나중에 알아보니 다카하시 고레키요 기념공원도 동경에 있다는데 언젠가는 방문해야겠다.

오클랜드의 노예로 팔려갔다가 일본 최고 권력자 중 하나인 대장대신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재임 시 쇼와 공황이라 불린 대공황에 대응해 정부 국채를 일본 은행이 매입하게 만들어 공황 극복이라는 신화적 업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군부 황도파에게 적으로 찍혀 1936년 2.26 쿠데타 당시에 살해 당했다.

진주만 공습을 주도했던 일본 해군의 상징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묘.

그 옆에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묘가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923년에 다마령원이 처음 열렸을 때만 해도 너무 외곽이라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하는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여기에 묻히자 그때서야 명성을 획득하고 인기 있는 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참 많은 명사들이 묻힌 묘인데, 알면 알수록 역사적인 인물들이 정말 많이 묻혀 있어서 언제 나중에 따로 날을 잡고 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번에 러시아 여행을 같이 다녀온 동행께서 늘 하시는 말씀을 새기며. "못 보고 남겨둔 장소들은 훗날 언젠가는 다시 오라는 계시이다."

여성전용칸으로 마무리. 하네다에서 김포로 돌아가며 2박 3일의 동경 아시아주의와 근현대사 탐방은 일단은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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