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개황 (3)

우즈베키스탄 개황 (3)

독립부터 지금까지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임명묵

독립 후의 모든 탈소비에트 국가와 마찬가지로, 우즈베키스탄은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첫째, 갑작스러운 독립에 따른 문제가 많았다. 우즈베키스탄은 거대한 소련 체제 속에서 면화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자본재나 소비재를 받아오는 농업에 특화된 경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중앙 정부의 보조금이 사라진 상황에서, 자본재, 소비재는 물론이고 식량이나 에너지를 해결하는 것도 문제가 되고 있었다. 사유재산이 도입되고 국제무역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소련 체제에서 70년 동안 형성해온 경제 관계를 대체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오랜 목화 농업은 우즈베키스탄의 토양과 수자원 문제를 악화시켰고, 우즈베키스탄 목화의 품질은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당장 갖추기 어려웠다. 요컨대 우즈베키스탄은 저품질의 면화를 모스크바에 공급해 저품질의 공산품을 받아오며 경제를 운영했는데, 이제는 저품질의 면화를 사줄 곳도 마땅치 않고 공산품을 아무리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호의에 따라서 주는 곳도 사라진 셈이 되었다.

국가 운영을 러시아인 엘리트들에게 맡긴 상황에서 벌어진 혼란함도 문제가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공간 구조는 많은 식민 사회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타슈켄트를 비롯한 현대적 도시에는 러시아인을 비롯하여 여러 민족들이 사는 코스모폴리턴한 구역이 있고, 그 공간을 둘러싼 현지 농민들의 땅이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통상적인 우즈벡인보다 더 잘 살았고,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그들이 실질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의 행정 기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우즈벡어를 한 마디도 모르고 살아도, 러시아어로만 살아도 무방했던 소련 시절의 타슈켄트와, 우즈벡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신생 독립국의 수도인 타슈켄트가 같을 수가 없었다. 독립 이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러시아인 인구가 유출되면서 우즈벡인 엘리트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야 했는데, 장기적으로는 효과를 볼 것이었지만 당장에는 그 손실을 메우기 어려웠다.

둘째로 지리적인 문제가 있었다. 소련 시절 한 나라 안의 행정 구역이었던 곳들이 이제는 국경이 되었고, 근대 국가의 국경 및 주민 통제에 따른 복잡한 절차가 생겨났다. 행정 경계를 넘어서 생활하던 유목민들의 이동 통로는 단숨에 막혔다. 대다수 주민들에게 더 심각한 것은 상품을 구매하고 판매하는 데 갑작스럽게 장벽이 생기는 것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즈스탄과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들 국가는 모두 내륙국이다. 즉 우즈베키스탄이 국제 무역의 대다수를 처리하는 바다의 항구를 통해서 물건을 사고 팔려면 다른 내륙국의 국경을 한 번 더 넘어야만 했다. 이는 우즈벡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여러 상품을 구하고, 또 우즈벡 상품을 판매하여 외화를 벌어오는 데 심각한 경쟁력 상실을 초래했다.

셋째로는 인구 문제가 있었다. 소련 시절에 이미 무슬림 인구의 출산율은 전혀 떨어지지 않는데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출산율이 급격히 낮아져 장차 인구비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슬람 전통이 살아있고 도시화율이 낮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20살만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셋 이상 낳는 가족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구는 늘어만 가는데,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식량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그들에게 적절한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전달할 역량부터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러한 인구 과잉이 치명적인 농촌 빈곤을 만들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온 이주민들이 도시 빈민이 되고, 그들이 정치적 불안정을 만들고는 하였다.

넷째로는 앞의 문제와 연관된 이슬람 문제가 있었다. 1970년대부터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의 농촌 지역에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었고,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는 이슬람 정체성의 공공연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전세계적으로 이슬람주의가 흥기하던 시기였고, 이슬람의 부활은 단순한 신앙의 회복 수준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란이나 터키,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여타 무슬림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중앙아시아에는 이 지역의 정치화된 이슬람 담론도 유입되었다. 이슬람주의는 농촌 빈곤과 도시 빈민 사이에서 '도덕적인 정치경제'와 '도덕적인 공동체'의 이상을, 샤리아에 따라 통치되는 국가로 구현할 수 있다는 이상을 불어넣었다. 아무리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이 소련 통치 속에서 상당한 수준으로 세속화가 되었다고 치더라도, 1990년대에 탈공산주의 전환 속에서 파탄이 난 중앙아시아 사회에서 이것보다 매력적인 이념을 찾기는 어려웠다.

타지키스탄 이슬람 부흥당.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타지키스탄을 휩쓸었던 타지키스탄 내전은 이슬람주의가 중앙아시아에서 어떤 정치적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였다. 신생 타지키스탄에서는 도시화된 서부 지역인 두샨베(스탈리나바드)와 후잔트(레니나바드)를 중심으로 공산당 조직 기구를 접수한 인물들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상대적 소외 지역인 동부 파미르 지역의 정치적 불만을 폭발시켰다. 이미 인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주의 정치 운동이 무자헤딘이나 탈레반의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던 상황에서, 타지키스탄 동부 세력은 종종 이슬람의 언어로 서부 세력과 맞서싸웠다. 타지키스탄의 내전은 지역 안정을 위한 인접국의 노력을 통해 간신히 진정되었지만,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동부의 페르가나 계곡의 많은 인구는 여전히 보수적 이슬람을 믿으면서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을 계속해서 키워가고 있었다. 키르기즈스탄 및 타지키스탄과 인접한 이곳에서 반정부 성향의 이슬람주의 운동이 격해질 경우에는 타슈켄트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페르가나 계곡과 그 중심 도시 안디잔과 나망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마지막 문제로, 이런 엄중한 상황을 제대로 헤쳐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타슈켄트 중앙 정치의 분열상이 있었다. 1920년대부터 형성된 우즈벡 공산당 내부의 타슈켄트 파벌과 사마르칸트 파벌의 경쟁 구도는 양대 파벌이 엎치락 뒷치락 하면서 지속되고 있었다. 20여년 우즈벡 공산당을 주도한 사마르칸트 파벌의 샤로프 라시도프가 몰락하고, 타슈켄트 파벌이 그 빈자리를 메웠으나, 소련 공산당 보수파 쿠데타와 모스크바 권위의 몰락, 1991년 독립을 거치며 사마르칸트 파벌이 다시 크게 부상했다. 그리고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인사에 속했지만 어쨌든 사마르칸트 파벌에 속한 인물이었다. 이제는 소련의 일개 지역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주권국 우즈베키스탄의 지도자가 된 카리모프는 사마르칸트 파벌의 우위, 그리고 본인의 독재 권력을 공고히함과 동시에 타슈켄트 파벌과의 화합을 추구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경제, 사회, 종교 등 온갖 문제가 속출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카리모프의 정치-경제 정책은 간명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맞서 극단적인 경찰 국가를 조성하고, 외부로부터 폐쇄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었다. 정치적 자유나 언론의 자유는 철저히 억압되었고, 야당은 실질적으로 정권에 도전할 수가 없었다. 공적 영역에 이슬람이 등장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이슬람 정체성의 표출을 억눌렀다. 정부가 자원을 모두 통제하고 대외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모두 관리하기 위해서 이중 환율제를 도입했다. 공식 창구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외환은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터무니없는 공식 환율에 따라서 교환되어야만 했다. 그의 치세 때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우즈벡 화폐인 숨보다는 달러가 더 신뢰 가능한 저축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는데, 공식 환율과는 다르게 실질 가치를 반영하는 외환 암시장이 성행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찰 국가화, 폐쇄 국가화로 인해서 안 그래도 어려운 우즈베키스탄 경제는 거의 성장을 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걸었다.

90년대의 어려운 와중에도 우즈베키스탄에 진출하여 세계 경영을 하고자 했던 대우. 우즈베키스탄에는 마티즈와 다마스 같은 정겨운 차들을 보기 아주 쉽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그래도 이러한 조치는 국가를 안정화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카리모프는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필요한 식량과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다행히 인근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가 에너지가 풍요로운 편이고, 소련 시절에 설치된 에너지 인프라도 있었기 때문에 에너지의 면에서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은 어쨌든 농토를 많이 보유한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식량 면에서도 아슬아슬하지만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면서 국민들의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더 필요했다. 특히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외국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소련 시절과 마찬가지로 경화가 필요했다. 카리모프는 두 가지 주요한 경화 수입 원천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나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면화 농업이었다. 면화는 우즈베키스탄이 국제적으로 그나마 판매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었다. 그러나 품질 면에서 다소 떨어지는 우즈베키스탄 면화가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철저한 노동 억압이 필요했다. 역시나 소련 시절에도 유구하던 전통을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노동력을 징발하여 면화 파종과 수확에 투입했다. 두 번째 수입 원천은 유휴 노동력을 해외에 파견하여 송금을 시키는 것이었다. 소련 시절에는 공산당의 인구 통제로 인하여 자유롭지 못했던 노동력 이동이 소련 해체 이후에 훨씬 잦아졌다. 수많은 우즈벡인들이 그나마 산업체나 일거리가 있는 러시아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러시아인보다 낮은 임금을 감수하면서 본국에 송금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중앙아시아 이주 노동력의 대거 유입에 따른 인종주의 단체가 난립하는 등 혼란이 컸다. 그런 와중에 우즈벡 노동자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나라가 있었으니 극동의 제조업 국가 대한민국이었다. 한국어가 유창한 우즈벡인들을 우즈베키스탄의 거리에서 비교적 쉽게 마주칠 수 있는데, 이는 카리모프 시절부터 이어져 온 우즈벡 이주 노동력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억압적 권력을 통한 국내의 정치 안정을 위해서는 하나가 더 필요했다. 바로 정치와 사회의 분열을 막고 권력 집중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국민 통합의 서사였다.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파벌로 갈라진 우즈베키스탄 정치를 통합하고, 자신이 모든 우즈벡인들의 지도자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이슬람 카리모프는 소련 시기부터 쓰인 우즈벡 민족사를 독립 공화국에 맞게 개정하여 새롭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티무르 제국과 그 창업자 아미르 티무르가 우즈벡인의 실질적 선조로서 기념되기 시작하였고, 티무르를 기리는 기념물과 단지가 조성되어 널리 선전되었다. 티무르는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안디잔과 페르가나 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우즈벡인들이 따라야 할 영광스러운 과거를 상징하게 되었다. 러시아에 정복당한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 숙청된 파이줄라 호자예프를 비롯한 민족 지식인들도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슬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정치적 이슬람, 혹은 이슬람주의와 연계할 수 있는 아랍이나 이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과는 구별되는 민족적 이슬람을 장려하고자 했다. 지역의 문화 전통 및 신앙과 습합된 수피즘이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이슬람주의에서는 대체로 배격하고는 하는 수피 성인들의 묘들이 정부 투자를 받아 새롭게 복원되었다. 이런 이슬람들은 이슬람 중에서도 특히 '우즈벡'의 민족 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켜세워졌고, 정치적이지 않은, 생활 영역에서 표출되는 정체성으로 장려되었다. 소련 시절에도 공산당의 민족 지식인을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민족사 쓰기 작업을 대부분 승계한 역사 쓰기는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우즈벡 정치와 사회는 통합을 비교적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부하라 근교에 새로이 조성된 낙쉬반디 수피 종단의 성묘.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이제 문제는 이러한 독특한 체제를 용인해줄 수 있는 대외적 우군의 확보가 되었다. 국가 운영, 에너지, 이주 노동력 송출 등의 문제로 우즈베키스탄은 독립을 하였지만 여전히 러시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우즈벡 민족의 지도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자 한 카리모프 입장에서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카리모프는 1999년에 러시아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한 기구인 '구암'에 가입했다. GUAM은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몰도바의 앞글자를 딴 국제 회의체였고, 우즈베키스탄이 가입하면서 GUUAM이 되었다. 카리모프는 동시에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구축하여 자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마침 2001년 9.11 테러로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며 미국이 중앙아시아에서 군사적 활동을 시작하며 카리모프는 미국과 좋은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 제기한 테러와의 전쟁은 카리모프가 이슬람 극단주의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국내 억압을 정당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깊숙한 중앙아시아 내륙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해야했던 미군은 중앙아시아에서 군사 기지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우즈베키스탄은 카르시-카나바드 공군 기지를 임대해주어 미국에 협조했다. 미국을 통해 국가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했던 카리모프의 계획은 잘 작동되는 듯 했다.

그러나 2005년에 보수적 무슬림이 많이 거주하는 페르가나 지역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발생하자 미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동부의 안디잔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도시의 통제력이 상실될 위기에 처하자, 카리모프는 군을 투입하여 수백명을 사살했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 진영은 이 사건을 우즈베키스탄의 심각한 인권 위기로 규정하고 카리모프 정부를 비판했다. 카리모프 입장에서는 이제 이슬람 극단주의와 러시아의 위협만큼이나, 자유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자신의 절대 권력을 흔들려고 하는 서방의 위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반면에 체첸이나 위구르 등지에서 무슬림 인구와 갈등을 빚고 있었고, 서구가 내부 자유주의자들을 통해 자국의 안정을 해친다고 생각했던 중국이나 러시아는 안디잔 사건을 달리 비판하지 않으면서 카리모프에게 믿음직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카리모프는 또한 2003년 그루지야, 2004년 우크라이나, 2005년 키르기스스탄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혁명인 '색깔 혁명'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 나라들에서 벌어진 연쇄적 민주 혁명이 우즈베키스탄까지 닿을 경우 자신의 권력도 위험해질 수 있게 되었다. 카리모프는 이미 2002년부터 나가지 않고 있던 구암을 2005년에 완전히 탈퇴하였고, 미국에게 카시-카나바드 공군 기지에서 퇴거할 것을 요청했다. 대신 우즈베키스탄은 2001년부터 가입한 중국-러시아가 주도하는 협의체 상하이협력기구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권위주의 통치의 우군을 북쪽과 동쪽에서 찾았다.

2005년 이후 카리모프의 우즈베키스탄은 별 다른 변화 없이 기존의 정책을 지속하게 되었다. 폐쇄 경제를 운영하고, 이중 환율제를 통해서 자금을 통제하고, 면화와 해외 송금액을 통해서 경제를 운영하고,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을 최대한 안정화했고, 이슬람 극단주의를 억압하는 이유로 자신의 철권 통치를 정당화하고, 우즈벡 민족 서사를 계속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10여년의 시간이 지나며, 우즈베키스탄은 점점 변화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높은 출산율로 늘어만 가는 청년 세대는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꿈꾸게 되었고, 인터넷의 확산은 외부 정보의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크림 위기를 기점으로 서방과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중국은 서쪽으로 향하는 대륙적 연결망을 복원하고자 했다. 카자흐스탄은 이러한 국제적 변화를 1991년부터 빠르게 이용하고, 자국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수출하면서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은 인접한 카자흐스탄으로 여행하고, 또 일하러 가면서 자국의 낙후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카리모프는 노쇠하고 있었고, 그가 병이 들어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고 온 지 1년 뒤, 2016년에 이슬람 카리모프는 25년의 통치를 끝내고 사망했다. 그리고 그를 국가를 사유화한 철권 통치자로 볼지, 어려운 시기에 국가적 안정을 어떻게든 회복한 지도자로 볼지에 관해서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내가 2015년에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우즈베키스탄은 카리모프의 철권 통치가 살아 숨쉬던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폭발물 검사를 해야했고, 달러를 숨으로 바꾸기 위해서 환전소가 아니라 동네 시장을 찾았으며, 100m마다 무거운 표정으로 거리를 지켜보는 경찰을 의식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소련 시기에 정지되어 있던 것 같았다(물론 이 생각은 2019년에 우즈베키스탄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던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많이 수정하게 되었다). 8년 간 우즈베키스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의 사후 더 개방적이 되었다는 우즈베키스탄은 정말 충분히 '개방'되었는가? 바로 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타슈켄트 '이슬람 카리모프'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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