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며 (1): 우크라이나의 소련 깃발

여행을 준비하며 (1): 우크라이나의 소련 깃발

임명묵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하리코프 지역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던 4월, SNS에 올라온 짧은 영상이 러시아어권 인터넷을 강타했다. 영상은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한 시골 마을의 집 앞에 서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허름한 집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는데, 그의 손에는 붉은색 소련 깃발이 들려 있었다.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할머니의 깃발을 땅에 내팽개친 뒤 발로 짓밟고 대신 먹을 게 담겨 있는 봉지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봉지를 땅에 내려놓으며, 이 깃발을 위해 자신의 부모님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말하고 영상이 끝난다.

(이미지 출처: BBC)

‘깃발을 든 할머니(Babushka s flagom)’는 러시아 인터넷에서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소련 깃발을 든 자그마한 노인과 우크라이나 병사들에 의해 짓밟히는 깃발, 그리고 자신의 기억이 그 깃발에 담겨 있다는 이야기는 현대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어떠한 정서를 극적으로 자극하는 이미지였다. 과거 초강대국으로서 자신들이 지녔던 자부심과 영광이 이제는 노년들의 기억 속에나 남아 점차 사그라들고 있는 현실, 그 자부심을 모욕하는 탈소비에트 국가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배후 세력으로서 서방. 요컨대 깃발을 든 할머니는 러시아가 왜 무력 침공이라는 수단을 써서라도 우크라이나 동부를 ‘해방’시켜야 하는지를 강변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이미지는 러시아 인터넷에서 곧바로 하나의 밈(meme)이 되어 재생산되었고, 러시아의 공식적, 혹은 자발적 프로파간다 이미지의 일부가 되었다.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깃발을 든 할머니의 동상을 새롭게 세워서 전쟁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깃발을 든 할머니 밑의 그림자를 칼을 들고 있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 넣은 벽화들이었다. 그 그림자는 볼고그라드, 옛 스탈린그라드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기념상, ‘어머니 조국이 부른다(Rodina – mat’ zovyot)’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1967년에 처절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몰자와 소련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이 기념상은 ‘대조국전쟁’이라고 불리는 독소전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념물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미지 출처: BBC)

깃발을 든 할머니와 스탈린그라드의 기념상을 겹쳐 놓은 벽화는 러시아인들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과 독소전쟁을 같은 서사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함의로 이어진다. 물론, 러시아인들의 이런 서사와 믿음은 바깥에서, 특히 서방 세계에서 보기에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다. 러시아가 방어자 입장이었던 독소전쟁과 공격자 입장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어떤 공통점도 찾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깃발을 든 할머니 에피소드 자체가 러시아의 프로파간다 기계의 일부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얼마 안 가 우크라이나 언론과 BBC에서는 하리코프의 병원에 있는 할머니와 인터뷰를 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안나 이바노브나라고 소개한 할머니는 전혀 러시아군의 무력 침공을 지지할 목적으로 소련 깃발을 든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그런 진위여부 따위는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전쟁을 지지하는 러시아인들, 그리고 전쟁을 결정한 러시아 수뇌부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Babushka Z: The woman who became a Russian propaganda icon
A video of an elderly woman brandishing a Soviet flag went viral, but what really happened?

그렇다면 대체 붉은 깃발의 주인공,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인들에게 무엇이었기 때문에 해체된 지 30년이 넘은 지금에서도 이런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올해로 80주년을 맞이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어째서 러시아에서 아직까지도 끝도 없이 메아리치는 이름이 된 것일까? 그리고 그 메아리가 어떻게 세계를 미지의 혼돈으로 밀어넣은 2022년의 ‘특별군사작전’이라는 폭풍으로 번진 것일까? 이런 질문은 러시아의 침공을 ‘양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제 관계의 새로운 격변 속에서, 어떠한 지역과 그 지역의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답을 할 필요가 있는 질문들이다.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 현장을 느끼고 오기 위해서 이번 여름에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러시아의 대동맥, 볼가강을 따라서, ‘어머니 조국이 부른다’ 동상이 있는 볼고그라드, 옛 스탈린그라드를 향해서 말이다.

(이미지 출처: Russia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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