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파시스트 순간 - 양성익
한국 우파의 이념에 관한 역사적 모색
태극기 집회, 나아가 한국 우파의 이념을 알 수 있는 글을 찾다가 집어들게 된 이 논문은 양성익 애리조나 대학교 교수가 쓴 하버드 박사논문인 <한국의 파시스트 순간>이다. 사실 역사적 파시즘에 대해서는 늘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논문의 존재 자체는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지간한 단행본보다 조금 더 두꺼운 논문을 내 전공도 아닌데 읽는 것은 부담되는 일이라 관두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탄핵 반대 집회의 저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직접 눈으로 본 다음에는 이것을 해석해줄 글을 읽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읽은 지 이제는 두 달 정도가 지나기도 했으니, 상세한 내용 요약보다는 키워드 위주로 이 논문이 한국 우파의 이념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가를 나눠보는 차원에서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논문은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 우파를 일종의 파시즘으로 규정한다. 물론 본론에서 파시즘이라는 규정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다만, 서론에서는 1945-1979 기간 한국 우파가 파시즘과 상당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음이 충분히 제시된다. 물론 양성익 교수가 쓰는 ‘파시즘’은 정치적 낙인찍기로서 파시즘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적 근대성을 모색한 후발국들이 채택한 이념 지향으로서 제시된다. 역사적 파시즘과 식민지에서 파시즘의 가능성에 관한 이론적인 이야기들은 일전에 내가 쓴 다른 글에서 설명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여 생략하겠다.

사실 <한국의 파시스트 순간>에서 ‘파시즘’보다 강조되는, 1945년부터 1979년까지 남한의 정치 담론을 관통하는 개념은 ‘초월적 민족주의(transcendant nationalism)’다. 나는 이것이 종교적 의미에서의 초월을 뜻하는 것인가 하고 호기심을 가졌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대신에 민족을 가르는 단층선들, 좌파와 우파, 농촌과 도시, 기성세대와 신세대 등의 구분을 모두 ‘초월’하고 한민족이 일치단결해서 생존과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민족주의를 뜻한다. 이 초월적 민족주의는 해방정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나, 그 연원은 구한말의 민족 위기 때부터 나타났고,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합의를 얻었다. 그래서 저자는 1945-1979년 한국 우파의 이념이 단순히 국가에 의해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광범위한 지지까지 얻어냈다고 주장한다. 정치인, 지식인은 물론이고 사회 일반을 포괄하는 이념 담당 국가 기관까지 일종의 복합체(complex)를 이루면서, 이 시기에 초월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한국 우파 이념은 일종의 헤게모니 이념으로 기능했다.
논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장과 2장이 있는 1부는 해방 공간에서 초월적 민족주의의 부상과 국가 권력이 그 이념을 어떻게 사회에 유포했고 동의를 얻어냈는지 다루는 이론적인 배경이다. 3장과 4장이 있는 2부는 초월적 민족주의의 역사관, 반공이 어떻게 민족주의에서 핵심 요소로 부상했는지를 다룬다. 5장에서 8장까지 포함된 3부는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 시기까지, 한국의 반공 민족주의를 일종의 ‘반서구 자유주의’로 규정하며 일반적인 냉전 자유주의와도 구분되는 특수한 성격을 다룬다. 9장과 10장이 있는 4부는 박정희 시기를 다루는데, 새로운 이념이 등장했다기보다는 1945-`1961년까지 축적된 반공 민족주의가 어떤 식으로 체계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장은 해방 정국의 위기와 초월적 민족주의의 부상을 다룬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독립과 식민지의 유산, 그리고 안정적 통치를 가능하게 한 일본 제국 권력의 예상치 못한 철수는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모든 갈등이 터져 나오는 ‘해방 공간’을 만들었다. 각 정치 세력과 사회 세력은 이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각자가 꿈꾸는 한민족의 정치체를 실현시키고자 분투했는데, 분단과 혼란 속에서 ‘일치단결’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다원적인 공존보다는 적대자들을 억압하고 심한 경우 아무렇지도 않게 제거하는 극단주의적인 행동으로 드러났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정서가 바로 초월적 민족주의였다. 특히 가장 시급하게 초월해야 할 것은 미국과 소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었는데, 일부 지식인들은 세계사적 대립으로 분단된 한국이 세계의 운명을 위해서 초월을 달성해야만 한다는 세계사적 사명을 주장하기도 했다.
2장에서는 알튀세르의 이론을 따온 ‘국가-이념 복합체’를 조명한다. 한국 반공 민족주의는 단순히 총칼을 앞세운 국가가 순진무구한 민중에게 이념을 강제한 형태로 확산되지 않았다. 해방 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 조국근대화 등을 거치며 남한 국민들은 국가의 이념을 진심으로 내재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근대 국가가 이러한 주체 형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언어와 담론을 생산하는 국가 기구를 활용해야만 했다. 양성익이 주목하는 기구는 4가지인데, 국민교육, 군대의 정훈교육, 민족주의 사학, 언론이었다. 즉 한국인은 학교에서 반공 민족주의를 배우고, 군대에서 군사훈련과 정훈교육을 통해 몸으로 체화해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병도를 비롯한 보수적인 역사학자들과 언론인들이 주조했다. 흥미로운 것은 훗날 좌파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개념들이 이때부터 이미 체계화된 형태로 등장했다는 데 있다. 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보수 민족주의 역사학도 신채호로 대표되는 구한말 민족주의 지식인의 계보 위에서 발전했다. 둘째, 1970년대 이후 진보, 좌파 사관 역시 박정희 때 완성된 우파 사관을 전유하며 발전했다. 민족의 시원으로서 단군, 이상적인 남성 국민의 모습으로서 화랑도, ‘국난 극복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민족사, 남북분단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선언되는 통일사관 등은 오늘날 한국사 교육은 물론이고 1950-70년대의 한국사 교육에서도 중심 서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이어받아 3장에서는 단일민족주의가 어떻게 반공 민족주의의 근간이 되었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다룬다. 역시 단군, 화랑도, 삼국통일, 이순신 등 외세로부터 자주를 외치고 통일국가를 추구하며, 민중이 언제나 국난 극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주체성을 강조하는 사관을 자세히 풀어낸다.
4장에서는 그렇다면 반공이 어떻게 남한 민족주의의 핵심 서사로 유입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구한말부터 심화된 민족주의 운동의 적통은 좌파였다. 우파는 미국, 혹은 임시정부 계열이 아니면 대체로 일본 제국에 협조 혹은 부역했던 ‘원죄’가 있었던 반면, 좌파의 주류를 주장하는 쪽은 제2차세계대전기까지도 지속된 항일 무장투쟁을 정통성의 근거로 끌고 올 수 있었다(이 구도는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진다). 해방 공간에서 민족주의가 가졌던 엄청난 힘을 생각하면 ‘일제 외세에 빌붙은’ 우파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신탁통치 오보 사건이 등장하면서 판세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이 오보는 미군정이 의도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어쨌든 ‘일본 앞잡이’라 비난받던 우파는 좌파를 ‘소련 앞잡이’라며 역으로 반박하며 생존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민족주의가 신성시되는 해방 공간에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상대는 제국주의 앞잡이, 우리는 민족의 대변자’라는 위치를 어떻게든 잡아야만 했다. 실제로 좌파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6.25를 일으키며 우파의 비난을 그대로 현실에 구현해버렸고, 1953년 휴전 이후에 북한은 그 유명한 ‘북괴’라는 멸칭을 얻게 된다. 우파 담론에서 북한은 물론이고 남한의 친북적인 좌파도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령을 받아 같은 동포를 학살한 반민족분자라고 할 수 있었다. 휴전 이후 남한 정부는 북한과 일본을 연계하는 반공반일 정치를 동원하여 남한이야말로 구한말 이래로 지속된 ‘국난’으로부터 민족을 수호하는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공 민족주의에 ‘파시즘’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과할 수 있지 않을까? 5장부터 논문은 본격적으로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에 있는 비자유주의, 심지어 반자유주의적인 성향을 탐구한다. 5장의 핵심은 ‘반자본주의’다. 한국은 냉전기에 미국이 이끄는 자본주의 진영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였고, 미국은 한국의 반공 정권을 지지했지만, 한국의 지식인, 정치 지도자, 국민 다수는 자본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모두 자본주의를 넘어서되, 소련식의 ‘폭압적 공산주의’와는 다른 제3의 길을 한민족이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대의 일반적 인식에 따르면, 서구 자본주의 적절히 제약되지 않았을 때 불평등과 불의를 유발하는 질병이 될 수 있었고, 주체적인 자본 축적이 불가능했던 식민지가 채택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었다. 사실 이러한 자본주의관, 특히 미국식 자본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를 넘어서는, 공동체 도덕으로 규율되는 자본주의의 추구는 당시 탈식민 국가들 사이에서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고, 후발국의 추격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정당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제3세계의 반자본주의 직관은 많은 경우 전간기 파시즘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카터 에커트의 <박정희와 근대 한국>에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군에 널리 퍼진 반자본주의 정서가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요컨대 공동체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 또 후발국이 선발국을 신속히 따라잡기 위해서는 자유시장은 ‘적절히’ 규율되어야 하고, 자본과 부유층의 사적 이익 역시 마찬가지로 더 큰 목표에 종속되어야만 했다.
6장에서는 개인을 짓누르는 한국의 집단주의를 다룬다. 아마 한국 우파에 관해서 자유주의자들이나 좌파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 그들은 ‘자유’를 그렇게 언급하면서 왜 이리 비자유주의, 반자유주의적인 수단을 좋아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장이다(사실 나는 좌파도 이 문제에서 크게 자유롭다고 보지는 않는다. K-방역을 생각해보아도 그렇고). 구한말에 한국 지식계에는 사회다윈주의가 광범위한 합의가 되었고, 적대적 민족끼리 적자생존을 놓고 경쟁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민족의 생존을 도모할지에 대한 절박함이 한국 사회에 기본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한국은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소아(小我)’가 아니라, 더 큰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대아(大我)’로 나아가라는 요청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사실 공동체의 공공선을 위해 개인을 일정부분 조정하는 것이 자유주의에도 필요하다라는 건 미국 실용주의, 공동체 교육에도 있던 것이었지만, 한국은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등장한 초월적 민족주의와 반공 민족주의에 의하여 완전한 집단주의를 긍정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제국주의로부터의 자유,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 즉 공동체, 집단, 민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개인적 ‘자유’는 유보 내지는 억압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7장에서는 이 ‘자유’의 문제를 조금 더 밀고 나간다. 우리에게도 놀랍도록 익숙하고 심지어 최근 젊은 세대도 아주 당연하게 얘기하는 ‘자유와 방종의 구분’이 이 장의 주요 테마이다. 냉전 질서에서 한국은 분명히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자유 진영’에 속한 나라였지만, 문제는 정치인, 지식인, 국민의 집단주의 정서와 이 표어가 명백히 충돌한다는 데 있었다. 물론 그들은 이것을 딱히 충돌이라고 생각 안 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관과는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인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자유와 방종을 철저히 구분했고, 방종의 경우 공동체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억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한국전쟁 이후 1공화국의 혼란은 이 방종이 사회적으로 넘쳐났을 때 사회가 퇴락할 수 있다는 공포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줄곧 한국의 무수한 언론과 지식인들은 주취 상태로 돌아다니는 무리들과 춤을 추러 놀러다니는 부녀자들,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교사에게 인사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자유를 행사할 능력이 없어 방종을 일삼는’ 이들로 호되게 꾸짖었다. 이 기본 구도는 오늘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게 매우 재밌는 점이다. 물론 이런 문화적인 영역으로만 끝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자유와 방종의 구분은 국가보안법 정당화의 주요 논거이기도 했다. 헌법학자 한태연은 서독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개념을 끌고와 공산주의나 나치즘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종을 막아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히 냉전 최전선의 반공 국가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공산당에 협조하는 ‘방종’을 용납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런 이념적 지형에서 서구식 민주주의가 그대로 정당화되기는 힘들었다. 8장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논의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다룬다. 해방 이후에 민족 구성원들이 자주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정치체로서 민주주의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론이었다. 그러나 국민주권을 향한 열망이 뜨겁게 타오른 것과는 별개로 실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인이 운영할 수 있을지, 혹은 한국인에게 이 정치체가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즉,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링컨식의 국민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체이지 시민 하나하나가 이성적 주체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조율하는 정치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두 가지 민주주의 회의론이 더 인기를 끌었다. 하나는 지금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1인 1표 민주주의(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모든 국민이 진짜 주인이 될 수 있게끔 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삼균주의나 여러 대안적 사상에서 주창했듯 한국인들은 항상 ‘경제민주주의’를 포함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국가가 만들어주는 것을 원했지, 국민에게 법이 정한 테두리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는 고전적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에 대한 방임이자 국민의 방종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 다음은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론이었다. 사회경제적 발전수준, 정치의식 모두가 떨어지는 한국인이, ‘유언비어에 쉽게 속는 기질’과 사회 유력자들에게 무비판적으로 매수되는 성격 때문에 민주주의를 당장 실행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국민주권’을 근거로 4.19가 민주주의 혁명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그 이후 2공화국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병폐’를 그대로 보여주는 실제 사례로 생생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순조롭게 예고하는 것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 정권 시기까지 초월적 민족주의에 근거한 반공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그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것은 1공화국 초기를 풍미한 이범석과 안호상의 ‘일민주의’였다. 하지만 국가-이념 복합체를 훨씬 더 능수능란하게 조직하며 초월적 민족주의를 완성한 인물은 박정희였다. 9장과 10장(4부)은 박정희 정권이 어떤 식으로 이전의 이념들을 국가 제도로 끌어와 체계화했는지 다양한 방면에서 조명한다. 다만 내용 자체는 논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3부(5장~8장)의 논의들이 종합되고 완성되는 느낌이라 새롭지는 않다.
결론은 박정희 정부가 무너지고 오늘날 한국에서 초월적 민족주의가 어떤 운명을 겪었는지를 다룬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다양한 반발(김지하, 함석헌, 운동권 등등)은 초월적 민족주의에 맞선 서구 자유주의의 반발이 아니었다. 국민들은 여전히 초월적 민족주의와 집단주의, 비자유주의적인 심성을 강하게 갖고 있었으며,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재야 인사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초월적 민족주의를 다시 전유하여, ‘반공 우파 정권’이 ‘민족’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 따져 물었고, 남북화해를 추구하는 새로운 종류의 집단적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민족주의 문제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이후 역사는 친일 문제가 발목을 잡고 우파가 점차 민족주의 문제에서 좌파에게 헤게모니를 잃으며 담론 지형, 나아가 정치 지형에서 좌파의 우위가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여기에 맞서기 위해 우파에서 뉴라이트 운동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민족주의라는 경기장에서 우파가 불리하다면 이 경기장 바깥에서 싸움을 해야한다는 발상이었다. 뉴라이트는 근대성, 개인, 법치, 자유 등 서구 자유주의를 문명의 표준으로 삼고 일본 식민질서를 문명화를 향한 노정에 위치시키면서 불리한 판을 바꾸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 내에서 여전히 초월적 민족주의에 근거한 반공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정동은 강하게 남아있다. 이 논문은 2023년에 발표되었는데, 논문 말미에 저자 양성익은 태극기 집회를 그 사례로 든다. 논문 도입부에는 현충원에서 박정희 대통령 묘에서 눈물을 흘리는 태극기 노인이 등장한다.
나는 이후 2024년 12월 3일부터 2025년 4월 4일까지 진행된 계엄-탄핵 정국은 한국의 초월적 민족주의와 반공 민족주의가 그대로 다시 분출하는 순간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계엄’은 얼핏 들으면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논문에 따르면 사실 한국 반공 민족주의에서 그것은 상식과도 같았다. 게다가 좌우, 영호남, 세대 갈등, 젠더 갈등을 모두 뛰어넘자는 전한길의 발언은 말 그대로 ‘초월적 민족주의’의 교과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부정선거에 대한 무수한 의혹 제기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열광했다는 링컨의 국민주권 연설과도 직결된다. 이번 사태에서 '중국'이 핵심 키워드로 등장한 것은 반공, 반탁운동이 반소련으로 쉽게 넘어가서 좌파를 '매국세력' '외세 앞잡이'로 몰아갔던 것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런 역사적 연원이 있기에 반중이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강력한 에너지를 상시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가 태극기 운동과 그 담론, 정서를 볼 때 이들을 단순히 ‘가짜뉴스에 휘둘린 극우’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우파의 사상이 명시적으로 계승된 것이든, 혹은 좌파가 전유한 민족주의 교육을 경유해서 등장한 것이든,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엄청난 유산을 남긴 특정한 이념의 맥락에서 태극기 운동이 터져나온 것이다.
논문에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이 논문은 주로 ‘국가-이념 복합체’로 간주되는, 교과서, 정훈교육 자료, 언론 논설, 잡지, 역사학 담론 등을 근거로 삼는다. 논문을 직접 읽으면 이 시기 논의들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그토록 익숙한 이야기들 상당수가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를 생생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파시즘의 순간”을 붙이는 것이 타당한가? 물론 나는 그것이 일정부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형태나 의미에서 파시즘과 유사하다는 관찰을 넘어서, 실제 파시즘 시대(1920년대~40년대)의 역사적 맥락이 해방 이후 한국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가 더 제공되었으면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다. 요컨대 5장에서 8장까지 개괄된 다양한 ‘반서구 자유주의’ 담론은 독일, 이탈리아, 특히 일본에서 매우 익숙한 이야기들이었는데, 실제 해방 이후 한국 지식인들 상당수가 일본식 교육을 받거나 아니면 독일을 주요 참고 사례로 삼았음을 생각하면, 역사적인 차원에서도 ‘글로벌 파시즘의 연결’을 더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양성익 교수의 지도교수인 카터 에커트가 만주군관학교를 통해서 그 작업을 해낸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이 부분은 더욱 많은 연구로 연결고리가 채워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